"화룡점정(畵龍點睛)"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아마추어든 프로든 상관없이 마지막으로 점 하나를 찍어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고민 끝에 점을 찍었는데 용은 그대로 있다. 여기가 아닌가? 한참을 들여다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보인다. 여기에 점을 찍으면 정말 날아갈 거야.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얼마나 고쳐야 그림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런 고민에 항상 빠진다.
A는 고칠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 스스로 만족해하며 완성을 선언한다. 또 B는 몇 주가 지나도 손을 떼지 못하고 계속 같은 그림에 매달린다. 누가 옳을까? 그림은 수학 문제처럼 정답이 있지 않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결국 그리는 사람이 손을 뗄 때가 끝이고 완성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A의 방법을 추천한다.
데이비드 베일즈와 테드 올랜드가 쓴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ART & FEAR)" 책에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며 A의 방법을 권하고 있다.
수업 첫날 도예 선생님은 학급을 두 조로 나누어서, 작업실의 왼쪽에 모인 조는 작품의 "양"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오른편 조는 "질"로 평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평가 방법은 간단했다. "양 평가" 집단의 경우는 수업 마지막 날 저울을 가지고 와서 작품 무게를 재어, 그 무게가 20Kg 나가면 "A"를 주고 15Kg에는 "B"를 주는 식이었다. 반면 "질 평가" 집단의 학생들은 "A"를 받을 수 있는 완벽한 하나의 작품만을 제출해야만 했다. 자. 평가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모두 양으로 평가받은 집단에서 나온 것이다. "양" 집단이 부지런히 작품들을 쌓아 나가면서 실수로부터 배워 나가는 동안, "질" 집단은 가만히 앉아 어떻게 하면 완벽한 작품을 만들까 하는 궁리만 하다가 종국에는 방대한 이론들과 점토 더미 말고는 내보일 게 아무것도 없게 되고 만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는 미완성(?) 작품이다. 다빈치가 눈썹까지 그려 넣었다면 더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까? 그건 모르는 문제이다. 오히려 눈썹이 없기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술은 참 미묘하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이 항상 올바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물론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옳은 자세이고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 하지만 완벽이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 선가는 스스로 끝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초보자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전문가 눈에는 허점 투성이로 보인다. 그래서 자신 있게 작품을 선생님께 보여줘도 항상 고칠 부분을 지적한다. 이런 경험이 계속 쌓이다 보면 점차 자신감이 떨어지고, 완성의 선언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종국에 가서는 계속 한 작품에만 매달리거나 미완성이라 생각하는 작품만 가득한 현실을 깨닫고 지쳐서 미술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내가 의도했던 바를 다 표현하고 그 결과에 수긍할 수 있다면 선생님이 뭐라 하든 일단 뻔뻔하게 끝을 선언하고 집으로 그림을 가져오자. 집에 걸어 놓고 몇 달 동안 생각날 때마다 쳐다보면 어느 순간 허점이 보이고 해결책도 떠오른다. 다른 작품을 하면서 경험과 실력이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때 다시 화실로 가져가 수정하면 된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불완전한 오늘의 작품에 심어져 있는 씨앗을 다음 작품에 꽃 피우기 위해 용기 있게 완성을 선언하자.
나는 참 말을 잘 안 듣는 학생이다. 선생님이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도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끝을 선언하고 집으로 작품을 가져온다. 그 덕분에 남들보다 많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고 최근에는 완성 시점에 대해 선생님도 별다른 이견없이동의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동안 집에 가져왔다가 몇 달 뒤 다시 화실에서 수정한 작품이 3개 있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순천만>과 오늘 소개할 2개 작품이다. 위쪽이 원작품이고 아래쪽이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