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을 끝내고 다음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 고민하다가 지난번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바닷가 풍경이 떠올라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뒤적거린다. 마땅한 사진이 없으면 인스타, 핀터레스트, 구글 등에서 이것저것 키워드를 넣어가며 이미지를 검색해 본다. 수십, 수백 장의 사진 가운데 한 장을 선택한다. 왜 그 사진을 골랐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른 것보다 뭔가 더 인상적이고 끌리는 느낌이 들어 선택한 것이다.
사진을 출력해 옆에 두고 캔버스에 최대한 있는 그대로 스케치하고 색을 칠한다. 하지만 사진을 선택할 때 받은 인상과 느낌은 아무리 해도 재현되지 않는다. 이상하다. 처음보다 더 세밀하게 스케치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색칠할 수 있는데, 점점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뭔가 부족한 느낌이 강해진다. 아직 실력이 부족한가? 더 열심히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사진에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사진은 빛의 예술이다. 사진작가는 빛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리기도 한다. 모네, 르느와르와 같은 인상파 전시회를 가면 "빛을 그린 화가"란 표현이 항상 나온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 역시 빛처럼 반짝이는 물체를 그림으로 재현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선명한 원색의 물감을 칠한다 해도 그림은 빛과 같이 밝아지지가 않는다. 물감은 빛이 아니다. 빛은 가산 혼합(additive mixture), 즉 섞이면 섞을수록 밝아지는 반면 물감은 섞으면 섞을수록 탁해지는 감산 혼합(subtract mixture)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인상파는 빛이 만들어 내는 인상을 재현(representaion)한 것이 아니라 표현(expretation)한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사진이나 눈에 보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한 폭의 캔버스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실마리는 재현을 포기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한 현대 미술의 대가에게서 찾을 수 있다. 1900년대 화가들 중에 표현주의라고 불리는 거장들이 있다. 1900년대 초반 프랑스의 야수파와 독일의 다리파 화가들이 대표적이다.
위의 그림은 야수파 화가인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작품이다. 원색의 파란색과 녹색으로 표현된 하늘과 땅에서 붉은색의 다섯 명의 무희가 서로 손을 잡고 원형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다. 마치 고대인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기쁨의 춤을 추는 것 같이 느껴진다. 만약 배경인 하늘과 땅이 실제처럼 그려지고 색이 칠해졌다면 인간의 원초적인 기쁨을 그림에서 느낄 수 있었을까?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마티스가 과감하고 대담하게 형태를 생략하고 원색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의도가 더 잘 전달되고 있다.
다음 그림은 독일 다리파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1880-1938)의 작품이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한 사람들이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선으로 그려져 있다. 사람으로 꽉 채워진 압축된 화면을 지배하는 공격적인 뾰족뾰족한 형태의 마무리는 화려한 도시 속에 감추어진 불안하고 뒤틀린 인간의 심리를 연상시킨다.
두 개의 표현주의 작가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의 재현보다 색과 형태의 왜곡이 작가의 의도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마치 아이들이 현실의 비례와는 상관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크게 그리는 것처럼 과장되고 왜곡된 표현은 보다 싶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현실의 왜곡은 표현주의 작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현대 미술로 들어서면서 많은 작가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림 속 여인은 모딜리아니의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왜 그는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을 목이 비정상적으로 길고 눈동자도 없게 그렸을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왠지 노천명의 사슴 詩에 나오는 "모가지가 길어 슬픔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가 떠올려진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모딜리아니와의 결혼을 극렬히 반대한 잔느의 부모님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이 가득 그림에 담겨 있다.
모딜리아니와 반대로 콜롬비아의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로는 사람을 물결치는 뱃살과 올록볼록한 팔과 다리를 가진 뚱보로 그렸다. 보테로는 풍만하게 과장된 인물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때로는 명화 속 인물이나 권력자를 뚱보로 표현함으로써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위트 있게 전달한다. 이와 같이 위대한 화가는 사진과 같은 정확한 묘사를 버리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색체와 형태를 왜곡시켜 보다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관람자를 감동시킨다.
정확한 형태와 색상으로 묘사하려 해도 절대로 사진과 똑같을 수 없다. 차라리 사진에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색체와 형태를 과감하게 과장하고 변화시켜 보자. 이것이 사진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초보자에서 벗어나, 느낌 있는 작품을 그리는 화가로 성장하는 첫걸음이다.
느낌 있는 작품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형태를 왜곡하거나 실제와 다른 색상을 선택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많이 주저하게 된다. 아무리 감정을 표한하기 위한다고 해도 두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데 실제와 다르게 스케치하고 물감을 선택하는 것이 쉬울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다고 수근 될까 두렵고, 본인 스스로도 한쪽 머리에서 "왜 하늘이 파란색이지 분홍색이야?"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나 역시 '산은 초록색, 하늘은 파란색'과 같은 고정관념에서 벋어나 현실과 다른 색상과 형태를 선택할 용기를 갖는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내 경험으로는 전체적으로 현실과 비슷하게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부분만 왜곡해서 표현해 보는 방법으로 단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용기를 갖는데 도움이 되고, 형태보다는 색상의 왜곡이 보다 쉽다.
남해 어느 바닷가에 가족들과 여행을 왔다. 저녁을 먹고 밤바다를 보기 위해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세찬 바람에 파도가 일렁이고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바다 너머에 있는 섬 뒤로 보름달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세찬 바람의 매서움보다는 왠지 모를 따듯함이 느껴진다.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어떻게 보일까? 전체적으로 시커먼 배경에 빛나는 달과 별뿐... 거기에는 바람과 따듯한 느낌이 담겨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은 실제 풍경의 왜곡과 과장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 이것이 사진이 줄 수 없는 그림만의 매력이다.
강 넘어 산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다. 추운 겨울은 언제쯤 끝날까? 저 산은 지금 눈으로 덮여 있지만 그 안에는 알록달록 꽃들이 봄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겠지.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뭘 그릴까 고민하면서 사진을 검색하던 중 이 사진을 보고 10년쯤 전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에 사는 동생 가족과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갔던 여행이 떠올랐다. 메마른 사막과 거친 황야를 지나 높고 험준한 산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여행길이었다.
사진과 같은 풍경을 차창 밖으로 봤던 것 같은 느낌을 되살리며, 사진을 보면서 캔버스를 채워갔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은 사진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사진 속의 험준한 산을 넘는 것은 고행 길이 아닌, 저기만 넘으면 라스베이거스가 나타나고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리는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즐거운 여정이다. 그때 나는 그림처럼 무지개 빛 산을 넘어 하늘 높이 올라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봄 집사람이랑 터기 일주 여행을 했다. 이국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스탄불,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 모든 것이 좋았다. 터키 여행의 감흥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이미지를 검색하던 중 위의 사진이 마음에 끌렸다. 터키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8배 정도 된다고 하는데 버스로 이동하다 보면 사진과 같은 거친 황야나 푸른 초원 지대를 몇 시간이고 지나가야 했다. 그리고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사진은 내가 받은 터키의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배경에 험준한 산과 바위를 그려 넣고, 기차를 쇄기 모양으로 추상화해서 나타냈다. 앞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먼 산을 바라고 있으면 움직이는 것은 기차뿐이다. 그리고 기차는 황야를 가로질러 저 멀리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한참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