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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게구름 Jan 19. 2020

인공지능을 위한 미학(2)

"인공지능, 전시회 일정이 잡혔으니 네 작품 중 10개만 골라줘"

"…"

"10개만 골라달라니까"

"주인님, 그동안 제가 게을렀던 것 같아요. 앞으로 하루에 1,000개씩 그릴 테니, 작품을 고르라는 말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가상의 대화지만 현재 인공지능이 가진 한계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인공지능 작품 모두가 작품을 만든 인공지능이 아닌 사람에 의해 선택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이 사람에게 느낌과 감동을 주는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자신 작품의 미적가치도 평가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미적가치 판단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시회에 걸릴 작품을 다른 사람이 평가해 선택할 수는 없다.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 내리는 일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미적가치 판단을 인공지능한테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 활동의 중요한 한 축인  '평가'가 불가능하다면, 예술 분야의 인공지능 활용은 절름발이 신세일 것이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듯이 '정보미학'은 컴퓨터(인공지능)가 미적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예술도 일종의 정보 커뮤니케이션 과정이기 때문에 섀넌의 정보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미(美)는 질서(불확실성)와 복잡도의 함수인 엔트로피로 측정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엔트로피와 미적가치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라파엘로(1509), <아테네학당>
잭슨 폴록, <number 1>

위의 라파엘로와 폴록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많은 사람과 배경이 등장하지만 점 원근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 작가가 전하고자고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반면 폴록의 <넘버 1>은 선이 무질서하게 마구 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폴록의 의도를 알아채기 힘들다.


두 사람 작품 중 당연히 폴록의 것이 엔트로피가 높다. 그렇다면 엔트로피가 높은 폴록 작품의 미적 가치가 더 높은가? 아니면 반대인가? 이 문제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달라질 수 있으며, 엔트로피 개념이 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던 50-60년대 뜨거운 논쟁이 붙었던 부분이다.

엔트로피 관련 논쟁을 이해하려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무는 조직이 잘 짜인 질서 정연한 물질이다. 당연히 엔트로피가 낮다. 하지만 불에 타면 열이 발생하고 조직이 와해되면서 결국 엔트로피가 높은 재가 된다. 재를 다시 나무로 되돌릴 수 없듯이 자연계의 현상은 전체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다시 말해 우주의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보다 더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무질서하다는 것은 곧 가치가 낮고 쓸모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러 광물이 섞여 있는 철광석을 정제해 철 제품을 만들듯이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무질서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발전해 왔다. 미술 역시 원근법의 발견으로 3차원의 현실을 2차원 평면 위에 질서 있게 구성하여 재현할 수 있게 됐듯이 다른 문명 발전과 비슷하게 진보해왔다. 이와 같이 자연의 엔트로피 법칙과는 반대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것을 네그엔트로피(negentropy)라고 한다.   


고전 미술은 확실히 네그엔트로피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 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서면서 흐름이 바뀌게 된다. 고전 미학의 근간인 점 원근법은 세잔 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입체파는 대상을 분해하여 임의로 배치했다. 칸단스키, 몬드리안 등 추상 미술에 와서는 대상을 연상할 수 있는 형태마저 사라지고, 폴록의 그림은 질서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이 과거와 상반되어 보이는 현대미술의 진화 과정을 놓고 한 부류는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일시적 현상으로, 반대쪽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라파엘로와 폴록의 작품 모두 미적으로 훌륭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ism)이 사라지고 극사실주의, 팝아트,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유형이 공존하는 '동시대 미술(comtemporary art)'로 넘어온 현실에서 특정 방향성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단순히 엔트로피의 높고 낮음으로 미적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가 엔트로피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섀넌의 논문에서 함께 제시했던 정보용량과 잉여도 개념 때문이다. 정보용량과 잉여도 개념이 미술에 어떻게 접목되는지 살펴보기 전에 엔트로피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자. 무질서하다는 것은 그만큼 불확실성이 크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엔트로피는 불확실성과 비례한다. 그래서 엔트로피가 크면 메시지 전달에 필요한 정보량도 커지게 된다.


우선 정보용량은 송신기, 수신기, 채널 각각이 단위 시간 동안 처리할 수 있는 최대 정보량이다. 스마트폰의 성능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정보 용량이 다르듯이 사람들마다 서로 미적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다르다. 예를 들어 저명한 미술 비평가인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와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폴록의 작품 세계를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열렬히 지지했지만,  나는 솔직히  그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상대적으로 엔트로피가 낮기 때문에 정보용량이 낮은 일반인도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은 사람마다 다르며, 이것이 미술 관점에서의 정보용량이다.


다음으로 잉여도는 메시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했을 때에 비해 얼마나 더 많은 잉여 정보를 전달했는지를 나타낸다. 어떨 때 내가 가진 미적 정보용량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될까? 그것은 관람하고 있는 작품의 엔트로피가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정보용량과 같을 때일 것이다. 내 정보용량보다 너무 낮을 경우 질서정연함을 넘어 유치해 보일 수 있고, 반대는 이해하기 힘들어 흥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 결국 잉여도는 각자가 보유한 미적 정보용량보다 얼마나 불확실성이 높은가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동통신에서 메시지를 전송할 때는 잉여도가 없는 게 좋지만 미술은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잉여도가 약간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기쁨에서 오는 것인지 아님 슬픔 때문인지... 약간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모호함이 흥미를 유발하고 자기만의 감상에 빠지는 즐거움을 준다.  


지금까지 섀넌의 정보이론에서 제시된 세 가지 개념(엔트로피, 정보용량, 잉여도)이 정보미학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봤다. 비록 정보미학이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지만 60년 가까이 흐른 현재 시점에서 세 가지 개념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의미를 재해석하고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앞서 엔트로피의 크기로 미적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엔트로피가 전혀 쓸모없는  개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복잡 미묘한 미술의 세계를 불확실성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계량화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을 뿐 다른 척도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처럼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명작(名作)들을 계량적으로 분석하고 공통점을 뽑아낸다면, 미적 가치를 측정하는 정량적 모델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美를 측정하는 정량적 모델이 만들어지면, 나이, 성별, 거주 지역, 미술 교육 정도 등으로 고객을 나누고 유형별로 선호하는 미술 작품의 특성을 축출할 수 있게 된다. '고객 유형별 선호 특성', 이것이 정보용량을 현재 시점에서 재해석한 정의이다. 그리고 잉여도는 평균적 선호 특성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나타낸다.


새롭게 정의된 정보미학의 세 가지 개념이 인공지능 미술에 접목되고 현실화되면 미술 생태계는 기존에 경험해보지 못한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그 변화의 모습은 이 글이 시작될 때 있었던 인공지능과 화가의 대화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조금 전에 기획자를 만나고 왔는데 이번 전시는 40-50대 중년 여성을 타깃으로 하겠다고 하네. 거기에 맞게 작품을 골라줘"

"지난번에 연령과 성별로 선호 특성을 분석해 놓은 게 있으니 어렵지 않겠네요. 내일 아침에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그리고 며칠 전에 10월에 있을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 방향에 대해 분석하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최근 5년간 비엔날레 입장객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20-30대 젊은 여성의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더라고요. 또한 온라인 경매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고, 이들이 낙찰받은 작품을 보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소소한 주제와 잔잔한 느낌의 그림 비중이 높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젊은 여성이 좋아하는 고양이를 소재로 하고 감성적인 느낌이 나도록 평소보다 색상과 형태의 파격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내 그림이 조금 과격하긴 하지. 미래 잠재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스타일을 조금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암튼 고마워, 인공지능"


어떤가? 멀지 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음악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추천 시스템과 작곡 지원 프로그램이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미술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대할 때 종종 큰 오류를 범한다. 인공지능이 사람과 닮았다고 생각하고 인공지능 작품이 사람보다 뛰어나느니 마느니, 사람과 동등하게 예술가로 인정해야 하는가 등 자꾸 비교한다. 이것이 인공지능이 변화시키는 미래의 핵심이 아니고 어쩌면 지엽적이고 낭만적인 논쟁에 불과할 수 있다. 핵심은 인공지능이 활용되면서 위의 대화처럼 제작, 유통, 소비의 미술 생태계 모든 과정에 혁신이 일어나고 활용 역량에 의해 성패가 결정 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속도는 념적인 언어가 아닌 인공지능이 처리할 수 있는 숫자로  美를 평가하는 '계량 미학'의 발전에 달려있다. 현재 박물관,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의 3차원 디지털 이미지 DB가 구축되고 이를 분석하는 미학적 이론이 뒷받침된다면 변화의 속도는 급격히 빨라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새로운 비즈니스가 만들어지고 미술 생태계 영역도 크게 확장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미술계에 몸담고 있는 예술가, 미학자 등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인공지능 전문가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인공지능 미술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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