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 시디 플레이어는 내가 가져온 시디를 통째로 깔끔하게 집어삼켰다. 기존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는 딸각이라는 소리가 난 후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가 지익~ 하고 났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고요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신문명이었다. 책의 두께로 소설의 분량을 알았다면 돌아가면 감기는 테이프를 보며 앨범의 남은 곡을 알아내곤 했다. 시디가 그렇다고 예측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앨범에서 듣고 싶은 곳의 트랙 번호를 누르면 한치의 실수 없이 딱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치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싶으면 정확히 짚어 펼쳐 읽어주는 전지전능한 존재 같았다. 건우는 소파에 앉아 내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드럼 소리가 천천히 거실을 울리고 흑인만의 소울 가득한 목소리가 우리의 귀를 기울였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카세트테이프로 듣지 못한 성스러운 울림이 느껴졌다. 천사들이 하늘에서 마지막 길을 가는 인간에게 들려주는 일종의 의식 같은 노래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키 만한 스피커에서 울리는 하모니가 천장에 닿고 거실을 한 바퀴 돌아 눈을 감은 체 세례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돌아왔다.
"죽이지 않냐? 크 "
건우는 술에 잔뜩 취한 어른의 풀린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나도 그들이 다 함께 합창을 하는 소리에 닭살이 돋으며 온 몸에 전율을 느끼던 참이었다.
"다르다~ 달라~소리가 달라~"
"전자제품은 일본이 최고래~한국이 절대 따라올 수 없다는 거지"
"그래?"
"아빠가 그러던데~ 이것도 이번에 일본에 포럼인가에 갔다 오며 아빠가 사 온 거야~"
엄마는 건우 엄마가 주축인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 건우네를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건우 아버지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내로라하는 대학병원의 외과의사였다. 건우의 집안은 의사라는 직업이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업이었고 누나 두 명과 건우 또한 대를 이어 의사를 시킬 거라고, 이미 확정된 것처럼, 말을 한다고 말했다.
" 근데 왜 제목이 길의 끝일까? 이 노래는 무언가 숭고한 느낌이 들어~ 삶의 문턱에 있는 사람의 애절한 외침 같은 게 느껴진달까.. 모르겠어, 이 노랠 들으면 인생의 마지막은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어~"
반복 재생을 누르니 우리가 원하는 노래만이 끊임없이 반복됐고 점점 노래에 취한 나는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속마음을 건우에게 말했다.
"아~ 멋진 말이다, 나도 처음엔 그런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앨범 뒤에 가사집을 보니 헤어진 연인한테 하는 말이더라고, 하하 , 중간에 오 마이 갓이라고 나오잖아, 나도 신한테 막 절규하는 줄 알았어~"
건우는 자신도 팝송의 가사와는 무관하게 노래에 흠뻑 취해 듣는 편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팝송 가사집의 영어를 해석하고 노랠 들으면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는 외고에 다니는 누나에게 들은 조언도 얘기해주었다. 녀석은 혹시라도 내가 무안하지 않을까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어 하하, 오 마이 갓~!!이라고 절규하잖아 하하"
우리는 흑인 보컬만이 낼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고음을 성대를 마구 긁으며 거실이 떠나가라 불렀다.
그날 이후, 수업이 예고 없이 일찍 끝나거나 시험이 끝나 남아있는 하루가 길어지면 건우의 친구들 몇몇과 버스를 타고 여섯 정거장 거리인 극장엘 가거나 건우네 집에 노랠 들으러 갔다. 원래였으면 학수의 무리들과 동네에서 아무도 찾지 않을 하천의 하수구 구멍에 들어가 , 어둠의 끝까지 두려움 없이, 누가 깊숙이 들어가는 담력 시합을 했을 시간이었고, 묘한 미소로 어디에선가 콘돔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한 녀석이 콘돔을 길게 느려트려 그 안에 비비탄을 넣고 총싸움하듯 발사하면 그것이 사용하는 용도는 애초에 의미가 없는 듯 강한 탄성을 이용해 뻗어 나가는 신기함에 서로 히죽히죽 웃을 시간이었다. 건우와 그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엔 나는 학업에 그다지 열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것이 전부라고 하기엔 아직은 입시나 학교 성적에 목숨을 걸 중요한 시기는 아니었다. 건우 무리들과 차츰 어울리면서 좀 더 마음이 편한 건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수 무리에서 이탈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매일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선 학수 집에 들르는 게 당연한 일상이었고 학창 시절의 친구 집단은 들어가는 건 어렵지만 자연스레 빠져나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학수가 무리의 왕을 자처하고 폭압적인 방식으로 친구들을 다루는 건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신이 찍은 타깃에게만 적대적이었지 다른 친구들에게는 갱스터 영화의 단골 배우 로버트 드니로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우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영민한 놈이었다. (그의 영화 중, '언터처블' 속 갱의 모습보다는'히트'에 가까운) 아군과 적군의 피아식별이 확실한 학수는 고만고만한 소년들 중에 세상의 돌아가는 질서를 빠르게 간파한 놈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때마침 학수와 급작스럽게 친해진 장원이가 무리에 합류하면서 무리는 진짜 갱스터가 된 것 마냥 좀 더 전문화되어 갔다. 장원은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중간줄에 앉아 한 뼘 정도 컸고 덩치도 나름 있어 무리들 중에 가장 형 같았다. 장원은 한 학기 동안 우릴 멀리서 지켜보고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꼭 짚어서 말하자면 학수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학수가 무리의 아지트인 학교 앞 놀이터에 그를 데려와 처음으로 소개했던 말은 싱겁게도" 얘 별명 짓는 거 귀재야~"였다.
장원은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매의 눈으로 찬찬히 둘러보더니, 예전부터 준비한 사람인 양, 별명을 하나씩 부여했다. 이미 '황비홍'으로 불리던 호중의 별명을, 호중은 이 별명을 참으로 마음에 들어 했지만, 장원은 하루아침에 '고릴라'라고 명명했다. 그의 작명이 기가 막혔는지 아이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호중은 고릴라와 생김새가 참말로 비슷한 게 아닌가, 첫 작명이 큰 호응을 얻자 나머지 아이들의 별명은 당연히 반박의 여지없이 새로운 별명이 됐다. 그때 마침 놀이터의 미끄럼틀 위에서 큼지막한 돌을 던지고 있던 내게는 '똘아이'라는 급조된 임시번호가 부여됐다. 오직 학수만이 별명이 없었고 그냥 학수였다. 건우와 있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만 학수 무리와 어울릴 때면 그들과 비슷한 성향의 행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났다. 기나긴 등굣길과 짝꿍으로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수였지만 나와 그는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장원은 학수와 만나자마자 서로가 같은 과임을 본능적으로 안 것 같았다. 장원도 신기하게도 주로 하는 말의 대부분은 누구, 누가 마음에 안 든다, 말 그대로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였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학수는 그런 장원이 무리에 들어온걸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좋아했고, 진보는 기술의 영역만은 아니었고, 타깃을 정해 괴롭히는 사냥의 방식도 날로 진화했다. 이전과는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타깃을 정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누가 봐도 주변에 친구가 없거나 조용히 공부만 하는 범생이었다면 이번에는 공부도 잘하면서 은근 친구들이 따르고 운동도 잘하는, 자칫하면 평판을 잃을 수 있는, 건드리기 쉽지 않은 타깃이었다. 다름 아닌 건우였다. 자고 일어나면 난데없는 몽정에 당황하는 이제 막 수컷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어린 사내들은 무리 안에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는 작은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