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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Mar 16. 2024

부모님과 시애틀 여행기

추억이 담긴 도시 여행


2시간40분의 비행시간 끝에 시애틀에 도착했다. 무려 11년 만에 방문하는 시애틀. 이 도시 곳곳에는 다양한 추억들이 서려 있다. 열아홉, 부푼 꿈과 미숙한 열정으로 무장한 내가 유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공항에서 ‘Welcome to Seattle’이라는 문구를 보자 미묘한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다. 서른 넷의 내가 다시 이곳에 왔구나, 그것도 부모님과 함께 셋이서.  



시애틀 여행 일정은 지난 두 달간 나를 지탱해준 희망이었다. 주말, 평일 구분없이 밤낮으로 일을 해야 했던 1월과 2월, 나는 자주 우울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것에 더해 밤낮없이 사무실을 위해 일해야 하는 무언의 헌신을 요구 받았는데, 일의 강도를 떠나서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이 내 안에서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의문에 대한 타당한 답을 스스로도 내놓을 수 없어서 그게 우울감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일이 끝나면 육아, 집안일에 허덕여야 했으므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방전 상태였다. 이런 나를 구제하기 위해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2월 중순 급히 미국에 사는 딸네 집으로 출동했다. 부모님을 보자 나를 조이던 긴장감의 끈이 약간은 느슨해졌다. 부모님이 두 아이의 학교 픽업과 집안일, 요리 등을 도맡아 주신 덕분에 난 그저 일에만 집중하며 비교적 우울했던 시기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드디어 3월5일, 선거날이 당도했고, 난 나를 가둔 감옥으로부터 해방했다. 그런데 사실 해방감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무함이 나를 덮쳤는데, 앞서 이 일을 했던 선배가 경고해준 그대로였다. 선거가 끝나면 허무해질 수 있다던 선배의 말처럼 난 허무함에 압도 당했는데, 아마 무대가 끝난 뒤 허무함을 느끼는 연극배우의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그래도 내게는 시애틀 여행이 있었다. 시애틀 여행을 향한 기대감은 떠나는 당일이 되자 고조됐다. MBTI중 대문자 ‘P’를 보유한 사람 답게 여행 계획은 여행 당일에 짰다. 워낙 짧게 가는 여행이다 보니 촘촘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애틀을 처음 방문하는 아빠를 위해 유명한 명소 위주로 일정을 짰다. 나와 남동생이 시애틀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 엄마는 한 번 시애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당시 워낙 바빴던 아빠는 한국에서만 시애틀 소식을 들어야했다. 아빠에게는 딸과 아들이 유학을 시작했던 시애틀이란 도시가 늘 미지의 세계 마냥 궁금했다고 하는데, 이번 기회에 아빠에게 시애틀을 보여드릴 수 있어 기뻤다.



금요일 오후 4시, 퇴근하자 마자 엄마, 아빠와 함께 버뱅크 공항을 향했다. 버뱅크 공항은 LA국제공항과 다르게 아주 조그만 동네 공항인데, 우리집에서 불과 30분 이내에 있어 틈틈이 유용하게 이용하는 곳이다. 다만 비행기 값이 조금 더 비싸긴 한데, LA국제공항까지 가야 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 비싼 값을 했다. 특히 이번에는 내가 휴가가 없는 관계로 퇴근 후에 여행을 가야만 했기에 버뱅크 공항이 우리에게 유일한 선택지였다.


비행 시간은 오후 6시15분이었지만, 우려했던 대로 비행 시간이 1시간 정도 뒤로 밀렸다. 팬데믹 이후 비행 시간이 지연되는 일은 미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고질적인 문제다. 그건 항공사들마다 인력난을 겪고 있기 때문으로 팬데믹 때 대거 직원들을 해고한 항공사들은 아직까지도 인력난에 허우적대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예약한 ‘알래스카 항공’은 업계에서 운항 취소 사태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곳 중 하나다. 알래스카 항공은 신규 파일럿, 승무원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현재 남아있는 직원들의 퇴사 속도도 매우 빠르다고 알려졌다. 그러니…이번 여행에서 운항 지연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공항 한 구석에 앉아 편의점에 파는 맛없는 샐러드볼을 먹으면서도 부모님과 나는 기뻤다. 이런게 여행이 가져다주는 설렘이리라. 우리 모두 이런 시간이 너무나 그리웠다. 지난 3주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한 집에 머물렀지만,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나누기 어려웠다. 여행길에 올라서야 우리는 온전히 우리 셋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남편이 우리에게 준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시애틀에 도착해 우버를 타고 다운타운을 향하는 길. 얼마만의 시애틀인지. 10년도 더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인생에서 2년 머물렀던 곳일 뿐이지만, 그 시간의 농도가 너무 짙어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큰 공간을 차지할 도시임에는 틀림없었다. 시애틀에서 보낸 열아홉, 스무살, 스물 한살의 나는 너무 예뻤다. 그러니까 설명이 좀 힘든데, 순수한 열정을 가진 청춘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해야 하나. 


그 시절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가고자 몹시 간절한 상태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대학이 뭐 그리 대수인가 싶지만, 그 때의 나에겐 대학이 인생의 전부였다. 원하는 대학에 가야지만, 인생의 다음 길에 진입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과 같은 집착이 내게 있었다. 원하는 대학으로 향하는 중간 통로였던 시애틀. 그곳에서 난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과 연대하며 그 시기의 고단함을 견딜 수 있었다. 내게 성공적인 도전기를 선사했던 도시라 지금까지도 '시애틀'을 떠올리면 아련한 감정이 따라온다.  


2박3일의 여행이었지만, 첫날은 비행기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으므로 실질적인 여행 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 단 이틀이었다. 일요일도 저녁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야했으니, 사실은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모님과 호텔 조식을 먹으러갔다. 시애틀의 풍경을 내려다 보며 나누는 여유로운 수다.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고, 서로 사진이 잘 나왔나 확인하며 킥킥 대던 그 순간 자체로 여행을 본격 시작하기도 전에 행복감이 100% 채워졌다. 마치 결혼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 이런 시간이 엄마, 아빠, 나에게는 너무 필요했구나, 싶었다. 남편,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을 만나면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내기는 어렵다. 현실적인 대화를 나누고, 모든 순간에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온 정신을 쏟아야하므로. 엄마, 아빠, 나에게는 우리만의 지극히 사적인 시간이 필요했고,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시애틀의 명소는 단연 '스타벅스 1호점'과 '스페이스 니들'이다. 이미 수없이 방문한 장소였지만 10여년 만에 부모님과 함께 방문하니 느낌이 또 새로웠다. 게다가 시애틀 다운타운은 생각보다 넓지 않아 대부분의 장소를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는데, LA와 비교해서 노숙자가 없어 놀랐다. 10여년 전보다 노숙자 수가 확연히 줄었다는 느낌. (상대적으로 LA는 기하급수적으로 노숙자 수가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시애틀 다운타운은 어느새 빌딩숲이 되어 있었다. 어느 곳은 마치 뉴욕의 연상될 만큼 신도시로 탈바꿈돼 있었다. 


날씨는 시애틀스럽게 온종일 비가 내리고 흐렸다. 하지만 때때로 비가 멈추고 잠시 햇볕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흐린 시애틀도 '이게 진정한 시애틀이지!'라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시애틀에 처음 방문한 아빠는 청년의 모습으로 이곳 저곳에서 호기심을 드러냈다. 확실히 여행은 사람을 젊게 만드는 힘이 있다. 




추억의 도시인 시애틀을 돌아 다니며 부모님과 나는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2박3일 동안 그저 부모님의 딸로 지내며, 여행 가이드 역할을 했다. 남편, 두 아이와 떨어져 온전히 딸로만 살았던 것이다. 당연히 남편, 두 아이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이지만, 때때로는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부모님의 딸로만 지내는 게 좋다.


엄마, 아빠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딸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 사람은 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걸까?"


"부모는 영원히 살 수가 없잖아. 너도 너만의 온전한 가정을 꾸려야지. 그래야 부모가 떠난 후에도 살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에게나 생은 유한하다. 나의 부모님은 점차 노인이 되어갈테고, 부모님의 보호 아래 편안하게 살아갈 나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몇 년 후에는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 그들을 살뜰히 보살펴야 할 시간도 올 것이다. 부디 그런 날들이 조금은 천천히 오기를 바랄 뿐이지만.


행복했던 시애틀에서의 2박 3일이라는 시간을 뒤로하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애틀 여행 덕에 이번 일주일은 비교적 기분이 좋았다. 여행은 분명 힐링의 효과가 충만하다. 앞으로 삶이 조금 퍽퍽하다 느껴지면, 사진첩을 들여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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