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모던걸에 대한 몰이해
한 작품이 실패한 이유를 단언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한 세기 이전의 청춘들이 서구에서 들어온 신문물인 향락과 춤을 즐긴다는 설정은 꽤나 매력적인 판타지/역사물의 소재였다. 역사의 무게를 덜어낸 채 만화적인 ‘희극성’을 강조했던 원작소설을 화면으로 옮긴 결과 정지우 감독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흥행과 평단, 모두를 놓친 ‘비극’이 되고 말았다.
당시(2008년)로서는 꽤 큰 80억 원이 투여되었지만 손익분기점의 절반도 넘기지 못한 비운의 <모던보이>는 당시 극장가에 만연하던 일제 강점기를 다룬 작품의 실패 징크스를 반복한 일련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또한 어쩌면 마지막이었을 박해일의 해사한 모습을 담은 멜로물로도 볼 수 있다. 미스터리와 코믹적 요소는 물론, 사랑 앞에서의 절박함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의 수가 많지 않음을 감안하면, 일견 그의 캐스팅은 타당해보인다.
반면 김혜수의 경우, 주인공의 에로스적 욕망의 현신이자, 시대를 풍미한 팜므파탈이자 비밀공작원이며 또한 사랑 앞에서 오열하는 여성의 모습까지 감춘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의 뇌쇄적인 매력, 그리고 청초함을 두루 강조하면서 ‘밤에는 열정적이고 낮에는 순종적인’ 한국적인 여성상을 구현해낸 결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사연 많고 비밀스러운 나머지 해독 불가능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12세 관람가’가 아니었으면, 육체의 차원에서 이 사랑의 불가해함과 끈끈함을 담아낼 수 있었겠지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선택의 결과 김혜수는 슬립 차림으로 섹스어필을 하며 시종일관 남자를 괴롭히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는 나쁜 여자였을 따름이다. 멜로의 캐스팅으론 예외적이던 연상연하 커플(꼭 여성이 많을 때만 따라붙는 표현이어서 이상하지만)이 케미가 별로라며 김혜수가 영화의 실패를 뒤집어쓰고 비난을 당했다. 아래의 기사에서 보듯, ‘나이가 너무 많다’는 편견과 지적이 빗발쳤다.
김혜수(38) 캐스팅은 ‘독약’이었다. 그 동안 단 한 편도 자신의 힘으로 영화를 흥행시킨 적이 없는 나이 많은 여배우를 대작의 중심에 세웠다. ‘타짜’의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김혜수였다. 그런데 ‘타짜’는 김혜수의 만화적 캐릭터가 영화의 ‘정마담’과 묘하게 맞아떨어진 일시적 성공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모던보이’ 중 김혜수는 평범하던 남자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매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영화 전체의 균형이 허물어졌다. 김혜수는 영화 편집 과정에서도 자기 의견을 강하게 어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혜수의 기를 살려주기에 급급하다 영화가 무너지고 만 꼴이다. 한국영화가 또 한 번 관객의 심판을 호되게 받은 셈이다.
<모던보이, 이래서 망했다- 중에서 www.dailyjeonbuk.com/news/articleView.html?idxno=29940>
이런 악평 덕일까, 그는 <도둑들(2012)>의 섹시한 도둑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동안 대중의 관심에서 비켜나 있었다. 김혜수가 의문의 여지없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것은 2013년 드라마 <직장의 신>을 통해서였다. 아역 출신의 베테랑 연기자로서 수십 년이라는 호된 성장통을 지나온 셈이다.
사실 30년대의 여성 캐릭터를 논함에 있어 사치와 향락, 그리고 방탕함의 아이콘인 신여성의 존재를 호명하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식민지의 끝자락, 폭압의 시기를 지나오면서 근대화라는 광풍을 통과하던 1930년대에 시대의 변화를 체화한 모던보이/신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극과 극이다. 시대의 암울함을 여성에 대한 억압으로 발산하던 남성들의 광기라고 표현하면 이를 비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무신 대신 하이힐을 신고, 한복 대신 몸매가 드러나는 양장을 갖춰입으며, 분칠까지 하는 이 신여성들은 일제판 ‘된장녀’라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그네들의 목소리는 지워진 채, 우리는 남성사가의 시선으로 기록된 파편들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신여성으로 극중 모던보이와 동일한 사이즈를 갖고 있으며 화류계(?) 종사자인 동시에 테러리스트였던 조난실(극중 김혜수)은 그야말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사랑에 약하디 약한, 한 남자와의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없어 절망하던 유약한 모습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바람에 그의 강인함 후반부에 이르러 휘발돼버린다. 가무에 능하고 매력적인 딴따라 조난실의 모습은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멋지고 섹시한 소품에 그친 나머지, 초반부의 주 무대인 연회장은 경성을 주무르던 세력가들의 뒷방 정치가 오고가는 ‘룸살롱적’ 공간일 따름이다. 모두를 매혹시키는 조난실의 춤과 노래는 영화의 첫 시퀀스이자 곧 그의 육체이며 이는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 중 하나다.
화려한 무도복을 입은 일급의 기생이 실은 일제를 타도하는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을 초래하지만 여주인공에게 최소한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을 쫓아다니던 스토커 수준의 이해명(박해일 분)의 진지함을 단박에 알아보고 밤을 함께 보낸 후에는 지고지순한 애인으로 돌변하는 그의 수동성 때문이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자신의 정당함과 신념을 설파하기보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며 울먹거리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관계에서의 수동성으로 발현되는 (일종의) 소녀성을 30대 끝자락의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만으로 문제 삼는 것은 너무 꼰대스럽지 않은가.
이 실패의 결과를 김혜수에게 돌리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다른 이유는,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이며 원작의 주인공인 조난실을 남성의 판타지로만 써먹느라 이해 불가능한 캐릭터로 만든 것은 원작의 작가, 감독과 제작진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가뜩이나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평가하는 남성의 시선을 디폴트로 놓고 세상을 바라보기 쉬운 우리는, 신여성이나 열사, 현모양처 말고 다른 여성의 모습이 재현되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패마저 너무 쉽게 여성의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결국 여성 원 톱의 영화 혹은 여성서사라는 관점에서 당대의 현실을 담아내는 창작자들의 콘텐츠를 더 힘주어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수렴하게 된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서, 조난실이 열연하는 쇼 비즈니스의 무대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끈하다. 스윙재즈 악단의 연주에 맞춰 중절모를 쓴 채 중성적인 매력을 자랑하던 조난실은 긴 팔과 다리를 거침없이 활용해 ‘여신’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한다. 그리고 모자와 겉옷을 벗어던져 뱅 스타일의 단발머리를 드러낸 후에는 육감적인 몸매와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한다. 이때 그의 몸은 시대(식민지적 현실, 계급의 공고함)를 거침없이 거스르는 어떤 무기로 작용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소년 같은 치기를 간직하고 친일파의 자식이자 총독부의 관료이며 한없이 비겁하게만 살아오던 한량 이해명을 각성시킨 원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몸은, 해방된 몸짓으로 표현되는 무대의 스펙터클은 강력한 힘이 있다. 그리고 그 강렬함을 고작 순진하게 깜박이는 (연상녀의) 눈망울로 희석시켜버린 연출이 아쉬울 따름이다. <모던보이>에 젠더 감수성으로 해석된 신여성의 캐릭터가 더해졌더라면 이는 망작이 아닌 시대의 명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결국 여성서사의 중요성을 모르는 일은 한국영화산업에 있어 다양성의 차원에서는 물론, 시대를 반쪽의 시선으로만 조망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남성 다역의 멀티캐스팅에 여성 한 명의 캐릭터를 부가적인 존재로 써먹는 영화가 아직 다수니 갈 길이 멀지만 한편으로는 <미쓰 백> 같은 영화가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 안도는 잠시뿐, 더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진다. 이는 남성서사가 디폴트이고 여성서사는 다양성 영화의 범주에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거나 혹은 그 결과로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왜 남성(=알탕) 영화는 상업영화고, 여성서사는 다양성영화로 분류되는지 여기서부터 의문을 가져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