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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r 04. 2019

‘미스터 싱가폴’과 춤춰 봤니?  

춤추며 여행하는 즐거움에 대해 

신입생 시절 외환위기를 겪었고, 해외 어학연수 한 번 가보지 못한 나는 해외여행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졸업 직전에 선교여행이랍시고 태국과 인도를 다녀왔지만 꽉 짜인 일정으로 고궁에 한 번 가본 것이 다였다(심지어 복음을 전하러 갔다 탈 교회하게 되었다). 직장인이 되고서는 월세와 대출금을 내면서 치아교정비와 라식수술을 하고 나니 2년여 일했어도 남는 게 없었다. 빈털터리로 프리랜서 반열에 뛰어들어 근근이 생활비를 벌며 연극을 하고, 여성운동도 했다. 한 마디로 돈도 시간도 없는 삶. 서울이 집이어서 딱히 독립할 필요도 없이 버는 만큼 쓸 수 있는 누군가가 참 부러웠다. 당시는 해외 댄스 대회에 참가 차 다녀오는 사람이 인생 최대의 부러움이었다. 시간도 돈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배낭 하나 둘러메고 몇 달씩 여러 나라를 현지인처럼 사는 여행자도 부러웠다. 그건 대부분 서구의 여행자들이 물가 싼 아시아권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3년 전쯤 다시 커플댄스를 시작했는데 이 춤에는 세계 공통의 포인트제도가 통용되고 있었다. 일정 숫자 이상의 댄서들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파이널에 올라가면 포인트가 주어지는데, 이 점수에 따라 일종의 ‘위계’에 속하게 된다. 처음 시작하는 단계는 노비스(Novice), 그리고 인터미디어트(intermediate)와 어드밴스(Advance)를 지나면 올스타(Allstar), 그리고 챔피언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문제는 아시아에는 웨스트코스트 스윙대회가 많지 않아서 가깝게는 싱가폴이나 블라디보스톡, 멀게는 미국이나 호주, 유럽까지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티와 워크숍, 대회 등으로 열리는 이벤트는 3일(금~일)이 기본이므로 직장인들은 금요일 연차를 쓰고 월요일 오전에 귀국하자마자 출근하는 식으로 스케줄을 소화하곤 했다. 


비용은 최소 백만원을 호가했다. 일단 항공권이 직항이면 이를 훨씬 호가했고, 대회 참가비가 약 20만원 가량, 그리고 대개 연회장을 갖춘 호텔에서 열리는데 프로모션으로 일반보다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었음에도 숙박비가 만만치 않았다. 조식은 불포함이고, 대개는 현지의 마트에 들러서 간단히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재료나 간편식 종류를 사왔다. 한국에서부터 라면과 밑반찬 등을 짊어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숙소에서 대개 홈파티를 하니 술값도 만만찮았다. 하루나 이틀 여행비용이 추가되면, 150만원은 우습게 깨졌다. 


코이트타워 전망대에서 바라본 샌프란시스코 도심 전경. 


내가 참가한 첫 댄스 대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부기 바이 더 베이’였다. 미국에서도 손꼽히게 물가가 비싼 곳이라 가기 전에 엄청 계산기를 두들겼다. 다행히 친구가 교외 위성 도시에 살고 있어서 일주일 정도 공짜 숙소에 머물며 근교를 여행할 수 있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시내까지는 자동차를 타고 나가서 한 시간 넘게 철도를 타야 했다. 도심의 필수 스폿을 둘러보고 나니 요세미티국립공원의 대자연을 탐험해보고 싶어졌지만 캠핑은 몇 달 전에 예약이 끝나서 꼭두새벽에 나서야 하는 당일치기는 포기. 그냥 어슬렁거리면서 가죽공예 숍도 가보고, 친구가 바쁠 땐 애도 좀 보고, 근처 아웃렛에서 (명품은 구경만) 쇼핑도 하고 영어자막 없이 반절은 이해 못한 채로 <킹스맨>도 봤다. 


그리고 대망의 첫 대회. 공연체질이라 남들 앞에서 춤추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이 매의 눈으로 어디 하나 틀리지 않았는지 보는 앞에서는 위축이 되었다. 약 140명의 댄서 중에서 20명 정도를 뽑는 세미 파이널에도 들지 못했고, 나머지 대회 일정은 구경만 하고 저녁 파티 시간에만 체력을 불태웠다. 피부색도 인종도, 국적도 다양한 사람들과 다채로운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일은 흥미로웠다. 한국에서는 나보다 몸집이 두어 배나 큰 사람, 혹은 암내가 심한 사람과 홀딩할 일이 별로 없었기에 서로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했다. 대회에 참가한 현지인의 대부분이 백인이란 사실도 드러내는 바가 있었다. 이렇게 대회에 참가하고 비싼 취미를 누리는 일은 계급적 격차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우리처럼 맘먹고 온 동양인들과 소수의 히스패닉 외에 피부가 검은 사람은 눈에 꼽을 만큼 적었다. 


굳이 긴 말 할 필요 없이 소통은 대부분은 몸으로 이뤄졌지만 교포(현지인)처럼 보이지 않는 나는 한국여성 중에서도 왜소한 신체 조건이라 춤으로 날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홀딩신청이 잘 들어오지 않아도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춤을 췄다. 첫 홀딩에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응했던 백인 남자는, 내가 고수랑 추는 모습을 보고는 금세 태도가 바뀌었다. 꼬인 마음으로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볼 법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 LGBT친화적인 도시로 정평이 났지만 (불법체류자일 수도 있는) 히스패닉 노동자의 조롱을 당했을 땐 영 기분이 나빴다. 그나마 같은 댄서로 소통할 땐 포인트로 이뤄진 위계를 제하면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낮에는 춤 워크숍, 저녁에는 경연대회가, 그리고 밤새 새벽녘까지 춤이 이어지는 별세계가 바로 댄스이벤트! 식사를 하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인 댄서다. 


그 다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온 춤 여행지는, 같은 아시아의 싱가포르였다. 아시아치곤 꽤 먼 비행거리(직항 6시간 반)였지만 1회 경유로 가뿐히 다녀오기에 괜찮았다. 미국보다는 마음이 편했고 춤 실력도 그사이에 발전했기 때문에 소셜댄스에는 부담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서구적인 문화의 도시인만큼 춤도 자유로웠고 사람들도 오픈마인드여서 꽤 즐겁게 놀 수 있었다. 함께 한국에서 온 댄서들보다는 주로 외국인 댄서들과 춤을 췄고 동영상으로 보던 유명 댄서와의 홀딩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뮤지컬리티(약간의 즉흥성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일)를 뽐냈다.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라고 할 정도였지만 이번에도 대회 운은 따르지 않았다. 어쩌면 침착하게 정직한 기량을 보여줘야 하는 대회와 안 맞는, 흥이 날수록 잘 추는 댄서 스타일인 것 같다. 재미있는 건 샌프란시스코에서 홀딩한 재수 없는 남자를 싱가폴에서 만났다는 사실! 다시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내게 플러팅이 통하지 않자, 그는 다른 동양인 댄서에게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양여성에 대한 페티시, 대상화는 백인 우월주의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싱가폴 친구들과 안면이 생긴 덕분에 한국에 춤을 추러 오면 반갑게 맞아줄 수 있게 됐다. 페북으로 몇몇 사람들과 친구를 맺은 후에 알게 된 건, 웬만한 백인 찜쪄먹는 피지컬의 소유자가 바로 ‘미스터 싱가폴’이었다는 사실! 그와의 홀딩이 마치 잼(즉흥 경연)을 하듯 매우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어쩐지 몸을 잘 쓴다 싶더라니, 그가 상의를 입지 않고 헬스장에서 찍어올린 사진은 굉장히 ‘훈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같이 한 장 찍어둘걸. 


공항에서 헤어지기 아쉬워 이런 사진을 찍고 놀았다. 


어쨌거나 춤을 추지 않았으면 언제 미스터 싱가폴과 손을 잡고 춤을 춰보겠는가 이 말이다. 각자 다른 문화권에서 왔지만 같은 춤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이자 친구를 사귈 기회다. 영어가 짧아서 누구와도 많이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계 어딜 가도 그곳의 댄스 신에 가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꽤 든든하다. 아주 뒤늦게 시작한 해외여행이지만 이렇게 몸으로 곳곳을 여행하는 건 꽤 신나는 일이기에 앞으로도 돈 되는 꿍꿍이를 벌여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에 다녀오려고 한다. 그래야 한국에서는 너무 대찬 여성이어서 당하는 타박이나 후려치는 말들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댄서의 기운을 발산함으로써 해소가 된다. 내가 춤을 놓지 않고 추는 이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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