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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Aug 07. 2018

바람처럼, 춤이 불어오다

잊혀진 한국영화 <바람의 전설>을 떠올리며

 

춤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연코 4D로 살아 움직이는 댄서를 만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도 엄청 좋아하지만, 영화 속에서 댄서를 만나는 일은 나름의 설렘과 역동을 갖고 있습니다. 잘 찍은 춤 장면은 몇 번이나 돌려보게 되죠. 영화의 서사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한 채로 춤 장면을 보노라면, 가슴이 터질 듯 희열을 느껴요(제가 댄서여서 더 그렇겠지요). 세상의 모든 춤을 사랑하며 단편 <탱고와 스니커즈>를 만든 사람으로서 춤과 영화가 만나는 순간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제 외장에 잠든 영화도 언젠가는 관객을 만나 춤추게 할 날을 기대하면서요.   
 
영화 <바람의 전설>의 한 장면. 꽃뱀 역할로 열연한 문정희 배우는 실제 살사댄서이기도 하다!

스윙댄스에 입문한 것은 2005년 늦가을. 벌써 십년도 훨씬 더 된 일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 공중을 멋지게 나는 스윙댄서의 모습을 보고 반한 것...은 아니고, 이제는 별로 기억하는 이가 없는 한국영화 <바람의 전설>을 보고서였다. 시시하고 따분한 가장에서 사교계의 거물로 등극한 풍식(이성재 분)을 수사하기 위해 잠입한 형사 연화(박솔미 분)이 서로 교감하게 된다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도 가물거리지만, 춤을 연마하느라 머릿속이 춤으로 가득한 주인공이 횡단보도에 스텝을 내딛듯 발을 딛는 순간, 바람이 불어오던 장면만은 또렷하다. 다소 작위적이지만 이 순간은 춤을 추는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춤으로 환치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버스나 전철 손잡이를 잡으면서 자신의 무게중심을 생각하거나 누군가를 보고 저 사람과 춤추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게 된다면?! 이미 춤중독 중증 되시겠다.    


당시 사회초년병으로 계약직 신분이던 나는 교회 바깥의 삶을 탐색하며 몸의 교류에 꽂혀있었고, 스물 무렵부터 춤을 춰온 아마추어 댄서였다. 스트릿 댄스의 발흥기였기에 내가 배운 것은 넓은 의미의 힙합이었고 그것이 락킹과 팝핀, 비보잉 등으로 세분화하며 춤 폐인을 양산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미션스쿨인 출신 대학에서 이것을 수용해 CCD(Christian Contemporary Dance-기독교 대중음악에 맞춰 추는 춤)을 만들었고 전국 각지와 가스펠 콘서트, 그리고 (선교라는 명목으로) 태국과 인도 등지에서 공연한 것이 대학 시절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이다. 학교 스웨트셔츠+청바지가 교복과 같던 학교에서 바닥을 쓸고 다니는 바지에 쫄티를 입고 다니던 나는 약간의 연예인 병을 보유한 신실한 청년이었고 잠시 CCM기획사의 백댄서로 연습하기도 했었다. 이 모든 것이 교회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이뤄졌기에 춤이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거나 연애의 수단이 된다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춤을 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사회초년생 시절 


춤과 연극에 꽂힌 나머지 취업에 대한 아무 대비도 없이 졸업한 나는 어찌저찌 비영리단체 활동가나 글 쓰는 일로 연명하고 있었다. 여전히 뮤지컬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로 ‘대학로 죽순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 스윙에 꽂히는 ‘덕통사고’가 일어나버렸다. 혼자 추는 춤이야 꽤 자신 있었지만 커플 춤의 문법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자주 듣지 않던 스윙재즈 리듬이 어색해 처음에는 헤매기만 했다. 그러다 이 춤을 정복하고야 말리라는 오기가 생겨서 그만, 망해버린 것이다. 나의 ‘춤바람’이 대체 언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옷깃이 이슬에 젖듯 삶과 춤이 뗄 수 없게 되어갔다. 


직장에서도 나의 ‘특이점이 있는’ 취미를 모두 알고 있었고, 평일 저녁 시간에 잡힌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밤샘도 불사할 정도로 (다녀와서 남은 일을 밤새서 해치웠다) 어느 것도 춤과 나를 가로막지 못했다. 술도 안 마시면서 밤샘 뒤풀이를 하거나 밤새 춤추고 새벽에 찬 플로어에서 쪽잠 자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정작 나는 누군가와 한 번도 연애를 못 해본 상태였다. 커플 댄스는 함께 손을 잡고 걷거나 눈을 맞추거나 도는 일로 이뤄져있고, 춤 고수는 연애도 많이 했을 법한 선수 이미지지만, 정작 상대의 마음을 훔치는 일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다. 함께 춤을 춘다는 이유로 마음의 교류를 빼먹고 몸의 교류로 직행하고자 하는 ‘늑대’로 가득한 커뮤니티에서는 맞춤한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은근 놀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연애를 해본 적이 있었어야지!  


직접 만든 빨간 구두.  동화 속 저주처럼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 하는 운명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친밀감과 스킨십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갖게 된 건 가족사와 성적인 괴롭힘을 포함한 왕따 경험 때문이다. 나는 첫 월경도 엄마에게 터놓고 말하지 못했다. 장롱 깊은 곳에서 생리대를 몰래 꺼내면서 사시나무처럼 떨었더랬다. 부끄러움보다는 오롯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었다. 2년 터울이 지는 언니가 성추행을 당하고 (성폭행으로 오인한)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한 것을 봤고, 언니가 말 그대로 미쳐버린 것을 목격한 후였다. 아버지에게 딸과 아내는 소유물과 다름없었다. 성교육은커녕, 언니처럼 신세 망치지 않으려면 몸조심하라는 엄명을 들었다. 교복치마는 가능한 한 내려입었고 또래 남자애든 성인이든 둘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았으며 모든 섹슈얼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거부하며 살던 내게, 변화는 스윙댄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비로소 상대의 눈을 쳐다보게 되었고, 맞잡은 손의 온기를 연애감정과 구분해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음침한 욕망보다 산뜻한 호흡으로 추기  


시대착오적인 금욕주의는 방구석에 팽개친 지 오래건만, 정작 실제로 어떻게 손을 잡아야 하는지, 상대의 요구는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 것인지, 협상이나 미루는 것이 가능한지, 무엇이 성적인 지분거림이고 폭력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해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적정한 시기에 연애서사나 몸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성격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사람 취급을 당했으므로 나는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결핍을 마주할 만한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처음’을 내치듯이 떨쳐버리고 얼마간 후회하기도 했다.          


때로 밀착해서 춤을 추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연애친화적인 것은 아니지만 난 명백히 춤과 괴리된 삶을 살고 있었다. 안전한 스킨십으로서 춤을 활용했고 이성과 대화하는 루트로 삼았으나 그 이상의 관계는 거부한 채로 살고 있었고 결국 어느 순간 관계에서의 문제 혹은 부작용 때문에 춤에서 멀어진 채로 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춤을 추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 번 춤의 역동과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자신과의 싸움과도 같은 헬스가 따분하게 느껴진다. 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끔 찾아오는, 동작과 호흡이 합치되는 경험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기 어렵고, 그것이 커플댄스를 추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순간이다. 

 

삶이라는 선택지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몸의 언어에 어떤 관심을 기울일지 고민한다면 춤은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 춤으로 밥벌이가 될 확률은 낮지만, 용돈벌이 정도로 병행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춤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있고 파트너십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떻게 춤을 추는지, 춤추는 동안 합의된 스킨십이라 해도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면서 움직이는지는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큰 힌트다. 춤은 내게 ‘절친’이며 음악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고, 몸을 단련하는 방법 중에서 독보적으로 재밌는 일이다. 몸의 액티비티, 새로운 움직임을 습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시간 날 때 고민하지 않고 댄스화 둘러메고 집을 나선다. 장르도 스윙(린디합)에서 시작해 탱고를 거쳐, 웨스트코스트 스윙과 주크댄스 등 라틴에도 야금야금 발을 들이고 있다. 대개 지하공간에서 흘리는 땀은 내일의 잔근육으로 환치될지니, 움직임을 통해 달라지는 나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요즘같은 무더위엔 댄스플로어에서 몇 곡을 추고 난후 쐬는 에어컨 바람이 최고다.    


<바람의 전설>에 나오는 꽃뱀도 제비도 없지만 서로의 소소한 매력과 장단점으로 소통할 수 있는 커플댄스의 세계는 ‘요지경’이요 요물이다. 차마 커밍아웃은 못 하지만 당신 옆자리 부장님 혹은 과장님도 밤만 되면 커플댄서로 변신할지도 모른다! 



글 / 이은 

[독립, 하셨습니까] 저자. 작가이자 영화 만드는 일을 하며 무규칙이종댄서로 불리고 싶은 사람. 웨스트코스트 스윙과 주크댄스를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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