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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Mar 22. 2023

일타스캔들 지실장은 왜 그럴까, 치열쌤 추앙하면 앙돼요

'나를 추앙해요.'가 일어나는 이유

일타스캔들 지실장은 왜 그럴까, 치열쌤 추앙하면 앙돼요? 

- '나를 추앙해요.'가 일어나는 이유






어떻게 추앙이 가능할까요?

일타 강사 최치열 옆에는 늘 지실장이 있습니다.

그의 입맛에 맞춰 음료나 음식을 제때 제공할 뿐 아니라 최치열이 불안할 때는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며 안심시켜줍니다. 최치열이 더우면 휴대용 선풍기로 바람을 쐬게 해주고 어디든 운전해줍니다. 지실장은 때때로 최치열의 비서이자, 운전사로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주위에서 자신을 아무리 놀리고 뒷담화해도 자신의 당연한 소명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항변을 들어볼까요?


“정성현! 왜, 도대체 왜?” 최치열이 소리칩니다.

“왜냐고? 왜인지 진짜 모른다고? 난 선생님 지키려고. 누나가 믿고 내가 믿는 유일한 어른이니까.” 치열이 이유를 모른다는 게 놀랍다는 듯 절규합니다. 지실장은 최치열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고 합니다. 타인을 ‘자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호하는 게 가능할까요?


‘미성년자는 잘못이 없어요. 다 으른들 탓이야.’ 최치열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지실장(극중 정성현)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업 부담을 짐처럼 지고 살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누나의 장례식장에서조차, 어머니는 내일이 시험이니까 얼른 들어가서 공부하라 강요하자 누나가 갑자기 사라진 상실감과 왠지 모를 죄책감을 처리할 길이 없습니다. 


누나는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만하고 좋은 어른은 최치열 선생님뿐이라 했어요. 누나에게 심리적으로 의지하던 성현(지실장)은 혼자 남아 치열에게 의지하죠. 의존하던 사람만 바뀌었을 뿐 우상화하고 의존하는 방식은 같습니다. 


최치열은 자신을 ’1조원의 남자‘라 허세를 부리지만, 실상 불면증에 식사 후 구토까지 하는 일상을 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깊은 낭떠러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지만 애써 구멍을 회피하고 견디는 중이었죠. 관계는 또 어떨까요? 친밀한 관계가 귀찮다 하지만, 오랜 친구는 떠나고 ’사는 재미‘가 전혀 없었죠. “뜨신 게 들어가야 또 살아지지.”라고 생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던 고시원 식당의 사장님 말씀은 희미해집니다.


지실장은 최치열이 치열하게 살수록 헛헛해지는 악순환을 옆에서 목격하면서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지실장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를 추앙할수록 현실 속 그 사람과는 멀어집니다. 


이상화와 추앙은 드라마에서만 있을까요? 의외로 자주 일어납니다.

아는 언니가 말하는 주식 종목과 식기세척기는 별다른 정보 없이 구매하고 믿는 형님의 말은 법이거니, 부부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도 이혼만은 하지 말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는 내면이 공허하거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나는 전혀 괜찮은 사람이 아닌데 왠지 저 사람을 좋아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면?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면이 헛헛하기에 정작 추앙하는 ‘그’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실장이 최치열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요. 허기질 때는 시장이 반찬이었다 존재감으로 배가 채워지면, 그 음식에 뭐가 들었는지는 상관없는 것처럼.


둘째는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한 시기에 추앙이 일어납니다. 일상이 괴로워 피하고 싶을 때 집중할 거리를 찾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폭 빠지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처음에 매력적이어야 추앙의 대상이 되겠지만요.

다큐멘터리 ‘성덕’은 연예인 정준영을 오빠로 좋아하다 그가 성범죄자가 되기까지 팬들의 ‘팬심 애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다큐를 만든 감독에게 친구가 묻습니다. “근데 XXX가 있었기 때문에 네가 그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대사가 콕 박힙니다. 추앙은 시린 시절을 견디게 합니다.


셋째는 내 욕구 실현이 절실할 때, 투사가 일어날 때입니다. 자기실현은 어렵지만, 투사하는 상대는 이미 내가 원하는 걸 갖추고 있어요. 내가 운동을 잘하고 싶다면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덧칠합니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캐릭터를 만들고 원하는 대로 키우듯 그 우상이 내 입맛대로 한다면?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겠지요? 

추앙은 나의 실현과 실천을 멈춰도 된다 합니다. 유예하기도 하고 더 자극해서 변화시키게도 합니다. 나를 바꾸기보다 상대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처럼 편한 게 어디 있을까요? 물론 모방과 그처럼 되겠다는 동력으로 수많은 덕후가 성공해 덕업일치와 성덕이 되기도 하지만요.


건강하지 않은 추앙은 대부분 ‘자기’가 부실합니다. 내면에 ‘나’라는 사람의 느낌, 욕구, 이미지, 등 견고한 정체성이 있다면 ‘추앙’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거예요. 파도가 수시로 드나들어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이 아닌, 반복되는 가뭄과 장마가 지나가도 어떻게든 굳어져야 뭘 심어도 심을 수 있겠지요? ‘나’라는 단단한 바탕이 있어야 추앙도 지나가는 바람이 됩니다. 지실장처럼 나를 잃고 ‘그’만 남는 모순처럼 허무한 게 있을까요?


부디 타인을 추앙하기보다 유일무이한 나를 안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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