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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Jan 01. 2021

25년 만에 정년퇴임하신 아빠가 내게 해 준 말

늘 듣고 싶었던 그 말


아빠는 오늘, 25년 만에 자유인이 되셨다. 2020년의 마지막 날인 어제는 공교롭게도 아빠의 정년퇴임일이기도 했다. 긴 방황 끝에 서른일곱에 공무원이 된 아빠는 다행히 25년 동안의 긴긴 노동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집에서 조촐한 퇴임식을 치렀다. 코로나 탓에 예정되어 있던 퇴임식이 취소된 관계로 동료들의 축하와 감사인사는 휴대폰을 통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으나,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내내 아빠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설렘에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오늘부터 아빠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셨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빠가 이렇게 진정으로 행복하게 은퇴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올해 초 아빠는 미친 듯이 불안해했다. 은퇴 후 남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갈피를 잡지 못해 얼굴엔 수심만 가득한 채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곤 했다. 밥 먹고 살 정도의 연금이 매달 꼬박꼬박 나올 예정이었지만 아빠는 자식들 걱정에 돈을 더 벌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얼 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 알지 못해 막막해했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다녀올 때면 아빠 얼굴에 비친 무겁고 어두운 기색에 내 마음마저 묵직해져 돌아오곤 했다. 그런 아빠 얼굴을 볼 때면 나를 보는 것 같아 더 슬펐다.  


아빠는 뭐라도 해보겠다며 한 두 가지의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는데, 공부가 영 재미없는 눈치였고, 뭐라도 해내야만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많은 날들을 스트레스 가득한 얼굴로 지내곤 했다. 그런 아빠 모습이 안쓰러워서였을까, 나는 아빠를 보러 갈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빠, 그러지 말고 좋아하는 걸 해.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면 결국 돈도 못 벌어.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을 좀 내려놓고 차근차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 응?”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여유 있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는 말. 극심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아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불안에 휩싸인 아빠의 귀에 내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빠는 혼자서 늦은 방황을 오롯이 겪어내야만 했다.  




그러던 아빠가 얼마 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한동안 들어본 적 없는 우렁차고 당당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울려 퍼졌다. 아빠의 목소리는 어찌나 크고 쩌렁쩌렁하던지 그 엄청난 기운이 넘치다 못해 한참이나 떨어진 나에게까지 넘실넘실 흘러오는 것만 같았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는 아빠의 신난 얼굴을 선명히 떠올리기에 차고 넘쳤다.  


아빠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했다. 나라에서 모집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문자격증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일이 얼마나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인지, 얼마나 운명적으로 그 일을 알게 됐는지, 그 일이 얼마나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꼭 들어맞는 일인지, 영업을 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나 안정적으로 일감을 얻을 수 있는지, 무려 30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이야기 꽃을 피워나갔다. 그 모습이 흡사 면접관 앞에 선 열혈 지원자 같기도 했다. 내가 면접관이었다면 눈을 감고도 가장 먼저 아빠를 뽑았을 것이다. 그만큼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아빠의 목소리에는 세상을 다 가질 듯한 희망과 기쁨의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30분씩이나 아빠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살짝 짜증이 나면서도 마음 한편이 찡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꿈을 찾은 아이처럼 들떠서 자랑하는 모습이라니. 아빠, 내년이면 이제 63세가 되시거든요. 그럼에도 아빠는 이제 공부하는 게 너무너무 재밌고 신난다고 했다.  


“지금까지 준비했던 자격증들은 정말 재미가 없었는데 이 공부는 너무 재밌어. 벌써 책 한 권을 다 봤다니까. 운명이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열심히 해서 꼭 합격해야지.” 


새로 시작한 공부가 어찌나 재미있던지 아빠는 그때부터 잠도 몇 시간 자지 않으면서 매일같이 엄청난 기세로 공부를 해오고 있었고, 드디어 오늘, 완전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아빠가 이토록 행복해진 덕분에 모처럼 네 식구가 함께 모인 식탁에 즐겁고 행복한 에너지가 넘쳤다.  






가족 송년회와 아빠의 퇴임식을 겸한 저녁을 거하게 먹고, 은퇴를 축하하는 촛불을 불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은 뒤, 남동생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며 집을 나섰고, 엄마는 연기대상을 보다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취기가 올라와 그만 방에 들어가 자고 싶었으나, 아빠는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한가득 있는 듯했고, 이대로 잠드는 게 아쉬운 눈치였다. 무엇보다도 모처럼 마음껏 마시는 맥주를 몇 잔 더 마시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이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분명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아빠 곁을 비울 수가 없었다. 그래, 평생에 한 번인데. 나도 맥주 한 캔을 따서 홀짝거리며 아빠의 무한반복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게 아빠의 이 엄청난 행복 에너지가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넘겼고, 우리는 벌건 얼굴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때 갑자기 한참 취해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아빠는 내게 말했다.  


“우리 딸도 책 빨리 내려하지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작품을 써. 그리고 즐겁게 살아. 알겠지? 아빠가 있잖아. 화이팅.”  


눈물이 핑- 고였다. 몇 달 전 내가 아빠 해준 그 말을 다시 그대로 아빠에게서 듣게 되다니. 그러고 보니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올해 초 수심 가득했던 아빠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요즘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함만 가득 안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왜 지난날 아빠에게 전한 그 말처럼 하고 싶은 걸 하며 즐겁게 살고 있지 못한 걸까. 나는 5년 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루빨리 첫 책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달려왔지만, 도저히 마무리되지 않는 글을 붙들고 씨름하기를 벌써 몇 년 째였다. 어떻게든 끝을 맺어보자며 몰아쳐봤지만, 그럴수록 내 꿈이었던 글쓰기가 점점 더 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달 전까지의 아빠처럼 나도 무척이나 두려웠다. 책을 내고 돈을 벌려면 뭐라도 쓰긴 써야겠는데 도저히 책 한 권 분량이 써지질 않았다. 그나마 몇 년 전 우연히 영감을 받아 쓰고 있던 몇몇 조각 글들이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의무감과 부담감에 짓눌린 채 글을 쓰는 건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덜컥 새로운 시작을 하기엔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그런데 이런 나를 보며 아빠는 해맑고 벌건 표정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정말로 살고 싶은 삶을 살라고. 진심으로 쓰고 싶은 글을 써보라고.  




잠시 후 내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다투기 시작했다.  


‘조은지, 좋아하는 글을 써. 몇 년 전에 쓴 글 몇 개에 발목 잡힌 채 죽어가지 말고. 너도 지금 진짜로 쓰고 싶은 글이 있잖아.’  


‘그렇지만, 그러면, 또 첫 책 출간이 미뤄지는 걸. 이젠 정말 책을 내야 해.’  


‘아니, 너도 알고 있잖아. 이런 식으론 영영 책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네 두려움 때문에 자꾸만 현실을 회피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아빠도 말했잖아, 빨리 하려 하지 말고 좋은 작품을 쓰라고. 네가 진심으로 쓰고 싶은 글을 쓸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그날 잠자리에서 나는 밤새도록 뒤척였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알면서도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결심이 서질 않았다. 그런데도 술기운 때문인지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리며 방망이질 쳤다. 어쩌면 머지않아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신호인지도 몰랐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새해의 아침이 밝았고, 나는 불쑥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냥 지금 쓰고 싶은 글을 쓰자고.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파묻힌 채 죽어가지 말자고. 정말로 쓰고 싶은 글을 쓰다 보면 운명처럼 길이 열릴 거라고.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이제껏 써오던 모든 글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오늘부터 새로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그 첫 번째 이야기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오랜만에 가슴이 설렜다. 이 글의 마침표를 찍을 즈음, 창밖에선 어느덧 새해의 태양이 나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p.s. 그날 아침 아빠는 역시나 어젯밤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빠가 내게 건넸던 따스한 응원은 내 가슴에 깊이 남아 한동안 내게 용기와 에너지를 불어넣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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