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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부라이프 Sep 30. 2022

위대한 엄마의 유일한 걱정.

 6녀 1남을 자녀로 둔 우리 엄마의 최대 고민은 그 ‘1남’이다. ‘나 죽고 나면 아들 하나 있는 거 천덕꾸러기로 남으면 어쩌니. 누가 저 녀석을 건사해줄까?’ 한걱정이다. 그 아들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남동생은 두개골이 자라지 않아 뇌가 크지 않았다. 지금은 두개골을 확장하는 수술이 있다는데 46년 전만 해도 장애의 원인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그저 몸만 자랄 뿐, 아이의 머리 크기는 커지지 않았다. 동생의 지능은 7살 수준에서 머물렀고, 나는 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내 동생은 특수학급을 가야 하는 아이라는 것과 복잡한 것은 설명해도 이해를 못 한다는 답답함이 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남동생의 장애가 별수롭지 않았다. 나도 어리고, 그 녀석도 어렸으니까. 고학년이 되면서 특수학급으로 들어가는 동생이 창피해졌다. 내 위로 언니들이 5명이나 있는데, 왜 나만 이 녀석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지도 불만이었다. 집에서부터 교문까지 잘 데리고 가서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냅다 교실로 뛰어가기도 했다. ‘누나!’하고 부르는 소리를 외면하면서. 마음 한편, 동생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또 미안했다. 해서 집에서는 친구가 없는 동생을 잘 데리고 놀았다. 동생은 시키는 대로 말도 잘 듣고, 조그만 것이 잘 웃어서 귀여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둘 뿐이었다. 


 그 시절이 그렇듯, 울 엄마도 아들을 원하셨다. 줄줄이 딸만 6명을 낳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으랴. 방금 아이를 낳았는데 딸이라고 하면, 금방 또 아이를 낳아보고 싶으셨단다. 다음에는 아들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아들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신 것 같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아이를 들고뛰었다. 심지어 점쟁이를 찾아가고, 굿을 하면서 세속적이고 미신적인 것에 기대기도 하셨다. 지푸라기라도 잡길 바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어미의 슬픔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엄마는 꼿꼿했다. 속이 상했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았다.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엄마는 장애인 아들이 있지만, 아들 위로 6명의 딸도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 엄마의 인생에 아들은 평생 끌어안고 가야 하는 숙제였다. 그래서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시간 낭비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엄마는 몸에 살이 붙을 겨를도 없이 종종거리며 살림을 불려 나갔다. 속상하면 속상한 만큼 더 열심히 돈을 벌었다. 악착같고 억척스러웠다. 


 동생은 덩치만 컸지 사회성은 발달하지 않았다. 엄마는 돈 번다고, 누나들은 모두 공부한답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니 텔레비전을 끼고 살았다. 브라운관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대화는 점점 불가능해졌다. 뭐 대단한 돌봄을 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 동생을 도맡아야 했던 나는 자꾸 화를 냈다. 말이 안 통한다고 동생을 밀어내는 내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내 인생을 살았다. 


 엄마는 본인의 역할을 넉넉히 넘치게 하셨다. 억척스레 모은 재산으로 딸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 하나 남은 숙제인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사신다. 남편도 없이 혼자 적적하실 엄마의 곁을 동생이 지키고 있다. 깔끔한 성격에 강아지는 어림도 없었지만, 남동생의 사회성을 위해 푸들 한 마리를 집에 들이셨다. 티브이 속에서만 살던 동생은 강아지를 산책시켜야 한다며 외출을 했고, 자기가 아빠라며 극진히 반려견을 돌본다. 동생이 강아지를 돌보는 건지, 강아지가 동생을 돌보는 건지. 아무튼 상부상조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이제야 엄마의 억척스러움이 이해된다. 아들을 볼 때마다 '결국 혼자 남아야 하는 때가 올 텐데. 차라리 내 앞서 갔으면..' 하는 가슴 찢어지는 걱정을 하는 엄마가 안쓰럽다. 스스로 돈벌이를 할 수 없는 동생의 노후가 근심이 되어 잠을 못 이뤘을 엄마의 지난한 세월이 애처롭다. 그 걱정이 다짐이 되고, 그 다짐이 엄마 삶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다니 나는 얼마나 무심한 딸이었나. 건강한 자녀를 낳아 키워도 애가 타고 근심 걱정거리가 한 보따리인데, 엄마 속은 시꺼멓다 못해 재만 남았을 거다. 자식들 다 키워 출가시키고 본인 인생 즐기며 사셔도 모자란데, 이제 동생의 노후는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 아직도 엄마의 한숨에는 근심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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