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신입생이 됐다. 번호를 매긴다며 운동장에 키순서대로 섰다.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뒷자리였던 나는 앞번호로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싶었다. '서로 처음 보는 처지에 나 중간에 좀 껴주라!' 다짜고짜 앞으로 갔다. 그랬더니 '너 키 크잖아! 뒤로 가!' 하는 핀잔이 들렸다. 머쓱해진 나는 어쩔 수 없이 맨 뒤로 갔다. 54명 중 54번. 또 맨 뒷번호다.
뒷번호의 최대 단점은 이거다.
지금이야 학교 내 체벌이 없지만, 우리 때는 담임선생님의 성적 관리라는 명목으로 체벌이 허용되던 때였다. 모의고사 점수가 나오면 지난번 보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들을 일으켜 세우고 반평균 하락에 대한 죄를 마구 뒤집어 씌운 후, 체벌이 시작되었다. '뒷번호부터 나와~!' 선생님의 독기와 혈기가 최고조에 이르고 에너지를 마구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몽둥이 세례는 맨 뒷번호인 내 엉덩이에 가장 먼저 분출되었다. 맨 앞에 앉아있는 앞번호 친구들은 얼굴이 사색이 됐다. 덕분에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것은 자의가 아닌 체벌을 피하기 위한 사투였다.
그리고 청소시간이 되면 항상 뒷번호 학생은 제일 무겁고 힘든 일들을 도맡아 한다. 체육관 정리를 한다던가, 큰 짐을 옮긴다던가.. 키가 크면 힘도 세다는 것이 무슨 법칙이란 말인가!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51,52,53,54번에게 기다란 마포걸레가 주어졌다. 다른 아이들이 교실책상을 밀고 청소할 동안 우리는 마포걸레로 복도청소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포부대로 불렸다. 청소시간이 되면 슬슬 마포걸레를 가지고 바깥 수도가로 가서 철벅철벅 걸레에 물을 묻힌 다음, 네 명이 나란히 서서 왔다 갔다 몇 번만 하면 복도청소는 끝이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다시 수돗가로 가서 청소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유시간을 가졌다. 반에서 제일 키도 덩치도 큰 뒷번호 4명은 '마포부대'라는 이름으로 더 끈끈해졌다. 도시락도 같이 까먹고, 매점도 같이 가고, 학교소풍 때도 붙어 다녔다. 언제나 '마포부대 나와!' 하는 호출이 떨어지면 4명이 동시에 일어서서 반의 궂은일을 담당했다.
30년도 더 된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끈끈한 친구들이 있다. 아직도 만나는 고교시절 친구 5명 중 51, 53, 54번 3명이 마포부대다.(52번은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다!) 다들 아무리 오랜만에 봐도 마치 어제 본 듯하고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고 내 편이 돼주는 친구들이다.
마포부대였던 친구 중 53번은 고교시절 3년을 내리 같은 반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그녀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은 참 맛있었다. 하교 후 날이 좋으면 포카칩을 한 봉지 사들고 친구네 집까지 걸어갔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 지하에서 치지도 못하는 피아노를 띵동 거리며 찬양을 하기도 했다. 대학 가서는 친구의 자취방에 가서 치킨을 띁으며 밤새 놀았다. 내가 결혼하고 신혼살림을 할 때, 미혼이었던 친구가 예고도 없이 찾아와 벨을 누르면 낮잠을 자다 말고 눈곱을 떼며 문을 열어줘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 임신과 출산, 아이들 돌잔치, 크고 작은 대소사에 늘 와주었다. 내가 대전으로 이사 가고 거리가 멀어졌지만,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도 그 시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던 친구가 아부다비까지 찾아왔다. 회사를 정리하고 잠시 쉬는 공백기가 생겨 3주를 이곳에서 보내게 됐다. 비행기값 들여 찾아와 준 것도, 귀한 시간 내준 것도 고맙다. 같이 갈 여행을 준비하면서 다시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30년 지기 친구랑 같이 가는 여행이라니. 신기하고 설렌다. 이제는 그 시절의 팔팔한 몸뚱이는 아니지만 그 시절만큼 웃어재낄 수 있는 마음은 준비됐다! 그 시절 느낌 그대로 뭉쳐보자!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