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학교에서는 11,12학년에 프롬 (prom)이라는 졸업파티를 한다. 여학생은 그날을 위해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을 쇼핑하고 남학생의 프러포즈를 기다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문화가 무척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생 한 번 결혼식에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고등학생 때부터 입고, 한껏 공주님이 되어보다니 부럽다 부러워.
그런 프롬 파티를 딸내미가 간다. 학교에서는 한 달 전부터 호텔을 예약해 주고 파티 초대권을 판매했다. 올해는 졸업 주인공은 아니지만 함께 즐길 수 있는 학년이다. 초대권은 10만 원쯤 된다. 하나도 안 아깝다. 내가 다 신난다.
“드레스 사야 되는 거야? 어디서 사지? 친구들은 어떤 거 입는다니? 머리는? 신발은?”
초대권을 사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설레는 나와는 달리 정작 본인은 너무 덤덤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 물어볼게요.”
‘어? 이거 뭐지? 얘 반응이 왜 이리 떨떠름해?’
나는 조바심이 났다.
“미리미리 고르고 주문해야지. 온라인으로 샀다가 수선해야 하면 어떡해?”
아부다비의 몰에서는 동양 여자애한테 어울리는 옷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 아이들의 글래머 몸매에 비해 초등학생같이 짧고 밋밋한 체형의 우리 딸에게 맞는 드레스 고르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인터넷으로 프롬드레스를 치니 몇 군데가 나왔다. 몇 번을 닦달하고 사정하고 매달려서 검은색과 하얀색 드레스 두 개를 주문했다. 해외배송인데 생각보다 저렴하다. 실패하면 어쩌지, 걱정반 설렘반이다.
2주나 걸려서 드레스가 도착했다. 잉? 택배 봉지가 너무 헐렁하다. 왠지 불안하다. 검은색 드레스는 어깨는 끈으로 되어있고, 가슴은 V라인에 허벅지부터 쫙 찢어진 심플한 A라인 드레스다. 걱정한 대로 모니터에서 본 것과는 영 다른 재질이다. 마치 속치마 천으로 대충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 같다. 길이도 약간 짧다. 오 마이 갓! 흰색 드레스는 더하다 길이는 조절할 수도 없고 그대로 입자니 가슴이 훌러덩 다 보인다. 천은 약간 반질반질 하지만 그것도 싸구려 레이온 느낌이다. 모니터에서는 백화점느낌이었는데, 받아보니 문방구 수준이다.
너무 맘에 안 든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주변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빨리 몰에 가보라고 성화다. 누군들 안 가봤겠는가? 맘 같아서야 아부다비에 있는 모든 몰을 다 돌고 싶지만 정작 본인이 너무 무관심하다. 수선이 필요 없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겠단다. 그나마도 겨우 설득해서 은색 하이힐을 하나 샀다. 뭔가 반짝거리는 건 하나 있어야 한다. 블링블링하고 번지르르 윤기 나는 섹시한 드레스를 입혀보겠다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석같은 딸내미는 자기가 예쁘니 옷이 뭔 상관이냐며 자존감이 드높으시다.
‘그래 니 자존감 높은 건 좋은데 엄마가 부끄럽다고.’
딸내미라고 예쁘게 입혀서 데리고 다니고 싶은 꿈은 아이 6세 때부터 박살 났다. 예쁜 원피스를 꺼내서 입히려고 하면 울고불고 죽어도 안 입겠다는 것이다. 불편하고 답답하다며 아침시간에 옷으로 실랑이를 하다 보면 유치원 봉고차를 놓칠 시간이 된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옷이 별거인가 싶어서 다시 편한 운동복을 입혔다. 지금까지 치마는 거들떠도 안 보는 여자아이가 돼버렸다.
대안학교를 다닐 때, 격식에 맞는 옷차림을 입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한 달에 한번 정장 입는 날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온갖 사이트를 다 뒤져서 원피스를 하나 샀다. 그렇게 단아하고 예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쩍 버리고 앉아서 친구들이랑 껄껄거리는 모습에 기가 찼다. 결국 그 원피스는 두 번도 못 입고 다른 동생에게 나눔을 했다.
이제 2주 후면 프롬이다. 드레스에 운동화를 안 신으면 다행인 그녀는 아직도 아무 관심이 없다. 나는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한국 사이트를 기웃거린다. 항공택배라면 날짜에 맞춰서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드레스를 보여주니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에라이, 이번 프롬은 나도 포기다. 니 알아서 해라. 대신 내년 졸업식은 니 맘대로 안 놔둘 테니 각오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