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2년 12월 3일 연재
한국 방문은 우리 가족에게 연례행사이다. 그래서 설과 추석 같은 큰 명절들처럼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다. 통상 체류기간이 아주 짧아도 2주가 넘기 때문에 시기와 기간을 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 후 직장이나 유치원의 상황, 그 외에 더 굵직한 행사 여부를 확인한다. 대략의 시기와 기간이 정해지면 그다음 오며 가는데 필요한 비행기표를 예약하는데, 보통 그와 동시에 많은 것들이 운명처럼 정해진다. 여름 성수기 시간, 겨울 연말연시 기간, 그 외 봄의 부활절 방학 기간, 가을 방학 기간과 겹치느냐 아니냐를 선택해야 한다.
코로나 전에는, 2-3월 즈음에 여름 한국행을 위한 항공편을 많이 할인하곤 했다. 무언가 규칙적이고 굵직한 패턴이 있으면 운 좋은 ‘찬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항공편 가격의 변동성이 너무 커진 탓에 이제는 늘 하던 예측이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 급한 일이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지불하던 값비싼 성수기 요금은 이제 일상이 되고, 되려 그 가격도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제는 일상적인 예측들에 소망까지 섞어야 한다. 그나마 아이들의 방학이나 부활절, 성탄절과 같은 ‘그래도 반복되리라 믿는’ 큰 연휴들만 내다볼 수 있다. 다행히 이번엔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어, 평소에 가지 않던 시기에 그나마 '납득이 갈만한' 가격의 항공편을 구했다. 이렇게 한국으로 갈 항공편까지 정해지면, 한국행 여정의 굵직한 뼈대가 정해진 셈이다.
우리 가족의 금년 한국 방문은 아이가 태어난 뒤 세 번째이다. 아이가 태어나 6개월 정도 됐을 무렵, 코로나 락다운 도중, 그리고 일명 ‘엔데믹’이라 일컬어지는 2022년의 이번 겨울. 처음은 처음이라 힘들었고, 두 번째는 판데믹때문에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이번 겨울은 아이가 씩씩하게 걸을 줄도 알고 말도 제법 통하니 아주 양호해졌다. 아이의 첫 한국 방문은, 파리를 경유해서 아내와 16시간을 날아서였다. 나는 당시 회사의 휴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내와 아이만 먼저 한국으로 출발했었다. 공항 탑승 전 눈물로 인사를 하던 그 베를린의 테겔(Flughafen Tegel) 공항은 이제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 분유에 기저귀에 장난감에, 바리바리 싸들고 출국장으로 향하던 그 순간과, 그 사이 이렇게 많이 큰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그것도 아련한 추억이다.
유럽의 대도시중 거의 유일하게 한국행 직항편이 없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1회 경유를 해야만 한국에 갈 수 있다. 베를린에는 직항이 없지만 뮌헨과 프랑크푸르트에는 직항이 있다. 이럴 땐 무늬만 수도라는 베를린의 별칭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공항(베를린-브란덴부르크 공항, Flughafen Berlin-Brandenburg)과 함께 직항도 생길 것이라는 교민들의 기대가 컸던 탓인지, 새로운 공항이 아주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요즘은 서운함과 아쉬움도 더욱 크다. ‘최소 1회 경유’의 피로감 때문인지, 매번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길은 만만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한다. 짐도 싸고, 선물도 준비하며, 누굴 만나고, 어디서 무얼 할지도 상상하며. 집을 떠나는 모든 여정이 여행이니, 행선지가 엄마 아빠에게 익숙한 '한국'으로 가는,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다.
이번 연도에 우리 가족은 헝가리를 거쳐서 한국으로 왔다.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하는 폴란드 항공사의 한국행 직항편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부다페스트 구경도 할 겸 그곳에서 탑승을 했는데, 말이 좋아서 '구경도 할 겸'이지 부다페스트 출발은 도시 구경이 먼저가 아니었다. 평소 가격의 3배 가까이 상회하던 항공편 가격이 먼저였다. 여행객이 많아지고, 항공사며 공항이며 직원 수가 모자라다며 아수라장인 공항을 이차저차 몇 번 직접 보고 나니 생각이 좀 많아졌었다. 한여름 피서철 산속 계곡에서 바가지요금 쓰듯, 아쉬우면 이용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훌쩍 올라버린 항공편 가격에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더 어수선하고 불편해진듯한 상황도 주저됐다. 그러다 우연히 동유럽 도시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직항편을 알게 됐고, 그에 맞는 일정을 그 시기에 ‘할 만이 상황’이 되어 부다페스트가 우리의 경유지이자 출발지가 되었다.
그렇게 멀리, 돌아 돌아오는 한국 방문 때마다 성장하는 아이의 반응과정을 보는 것이 이제는 한국 방문의 새로운 묘미이다. 집안에서 쓰는 한국어가 유치원에서 쓰는 독일어와 다르다는 걸 인지하는 아이에게 한국의 한글 표지판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 모양이다. 더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쓰는 한국말이 신기한지,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린다. 신기함에 쉼 없이 재잘대는 아이를 보니, 진짜 한국에 오긴 온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에 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 가족이다. 오랜만에 직접 마주하는 가족들은 그동안 멀리 살아온 시간을 단번에 느끼도록 해준다.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은 친근함과, 서로에게 흘러버린 시간을 함께 마주하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한다. 그렇게 가까이 마주 보며 화상통화가 다 전하지 못한 그동안 말린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서 더더욱 한국 방문에는 일정을 촘촘히 정성스레 짜야한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한 시간, 어른을 위한 시간 등, 현재는 우리 부부가 시간과 일정을 조율하느라 어른들만 바쁘다. 그러나 아이가 좀 더 성장하면 자신만의 일정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자기도 자기의 친구를 보러 가고 싶다면서 말이다. 물론 이 일정 조율 과정 역시 여행의 일부이다. 한국의 맑고 푸른 가을 날씨를 상상하며, 그동안 보고 싶었던 누군가와 보내는 순간 역시. 그리고 이 정도쯤에 드디어 등장한다. 이번엔 기필코 먹고 오겠다는 메뉴. 유튜브와 인터넷으로 열심히 예습한 메뉴부터 언제 먹어도 마음까지 배불러지는 집밥까지.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를 두 번이나 비웃은 금년 한국의 가을은 유난히 날씨가 좋다. 거의 매일 15도 웃도는 포근한 날씨와 아직 불그스름한 가을 잎사귀가 달려있는 풍성한 나무들은 언제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따스함을 가득 채워준다. 해가 짧아진 것 말고는 지금이 봄인지 가을인지 헷갈릴 정도의 따스한 날씨는 추수 후의 마음들마저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인지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가을 날씨를 즐기려는 인파는 어느 곳에 가나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붐빈다. '그래도 11월 말인데'라는 생각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두터운 오리털 외투를 하나씩 구입해 어리둥절한 우리 부부는, 새로 산 두터운 겨울철 외투를 언제나 게시하려나 염려한다. 이 외투를 살 때만 해도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날카로운 겨울바람과 낫게 건물 사이로 보일랑 말랑 누워 있는 햇살을 연상했는데 말이다.
이런 화창하고 맑은 늦가을 날씨와 상관없이, 한국은 실내 문화의 강국이다. 점점 더 많아지는 대형 쇼핑몰들과, 거의 모든 신축 아파트에 당연하게 신설되는 지하주차장 등은 외부 날씨와 독립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테라스, 발코니, 베란다 등등 주거 공간과 맞닿아 외부를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은 이제는 당연하게 내부 공간으로 확장된다. 아파트에서 지하 주차장을 거쳐 대형 쇼핑몰에서 주말을 보내면 사실 화창한 날씨를 마주할 틈도 없어진다. 주거공간, 업무공간 가릴 것 없이 어딜 가나 공기청정기가 환기를 대신한다. 햇빛의 결핍을 자주 느끼는 베를린의 겨울을 생각하면, 한국의 따스한 겨울 햇빛을 진공포장이라도 해 가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실내 문화도 역시 한국에는 즐길거리가 많다. ‘키즈카페’로 통칭되는 문화 역시 한국의 고유한 실내 문화다. 아이는 물론 보호자들까지 배려된 이 수많은 시설들은 실생활과 너무 밀접해, 가히 ’문화‘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주말에 되려 한산한 놀이터의 모습이 처음엔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주말에 훨씬 붐비는 베를린의 놀이터 풍경은 베를린에 ’키즈카페‘ 문화가 생기면 분명 바뀔 것이다!
지난번 한국 방문에 주말에 아이들이 없어 한산한 놀이터를 거의 점유하듯에 아이와 함께 논 적이 있었다. 아직 한여름이라 부르기 이른 6월 초 날씨임에도 쨍쨍한 햇살에 새까만 머리 꼭대기 정수리가 익을뻔했었다. 겨울도 마찬가지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에 실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기는 쉽지 않다. 꽁꽁 얼어붙은 놀이기구들은 지칫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러한 한여름과 한겨울의 극한의 날씨 차이를 생각하면 한국의 실내 문화는 어찌 보면 적응의 결과라 볼 수도 있다. 비록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지, 바깥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볼 수 없지만 항상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갖춘, 심지어 일주일 내내 휴일 없이 운영되는 실내 키즈카페들이야 말로 아이의 양육에 있어 병원만큼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 수요를 잘 아는 듯, 카페들의 다양성과 질도 점점 발전한다. 그러니, 한국에 올 때면 지칠 때까지 키즈카페를 돌며 베를린에서 누릴 수 없었던 문화를 즐기는 것도 이제는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이렇게 1년에 한 번 정도 한국을 다녀오면 다른 휴가를 계획하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매년 유럽 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한 시간과 경비가 드니, 우리 가족 역시 한국을 다녀오면 씀씀이를 메꾸느라 계절이 바뀐다. 휴가 기간만 더 길면 비용이야 빚을 져서라도 열심히 유럽을 더 열심히 구경을 다닐 텐데 아쉬운 마음뿐이다. 여행은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일상과 다른 새로움이 주는 이색적인 풍경이다. 눈으로, 입으로 느껴지는 새로움들이 설레게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처음 오는 장소에 왔으니,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모든 걸 즐겨야 한다. 그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곳이던, 너무나 익숙한 곳이던,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곳이던, 집과 일상을 떠나 체험하는 그 순간들이 매일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사진, 동영상을 보며 추억하고, 또 다른 추억을 만나러 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