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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Feb 25. 2023

소풍 가는 날

경향신문 토요판 '다른 삶' 2023년 02월 25일 연재

화창한 햇살, 눈부신 하늘, 하늘하늘 가벼운 복장, 도시락과 맛있는 간식들이 가득 담긴 조그마한 가방, 숨바꼭질, 그리고 추억의 소중한 기록들인 사진들까지. 아직도 어린 시절 소풍날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디에 갔었는지, 가서 정확하게 몇 시에 무얼 하고, 어떤 친구와 붙어 다녔으며, 선생님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아쉽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작 긴 시간이 지나 기억에 뚜렷이 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그날의 따스한 감정들과 그 표정들을 담은 사진들이다.


정작 많아봐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소풍' 혹은 '야외견학'이라 하며 대규모로 버스 등을 타고 단체활동을 했으니, 유치원이나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왜 그렇게 자주 가지 못했을까를 생각하면, 그 행사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들이, 특히나 어른들의 노력들이, 아마도 더 자주 가지는 못하게 했을지 모른다.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운동회와 더불어 연중행사 정도로 기억하는 엄마, 아빠와 달리 우리 집 아이는 '소풍'을 아주 자주 간다. 아직 본격적인 봄은커녕 아침엔 영하를 웃도는 쌀쌀한 날씨에도 아이들은 '소풍'을 간다. 물론, 엄마와 아빠가 경험한 '소풍'과는 조금 다르다. 특별한 준비물도, 특별한 마음가짐도, 날씨에 대한 염려도 없다. 평범하다 못해,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 아이들의 '소풍'은 그래서 일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시 곳곳을 누빈다. 예외 없이 형광색 조끼를 하나씩 입고, 손에 손을 잡고, 선생님의 인솔을 따라 졸졸 버스와 지하철, 에스반을 탄다. (S-Bahn, 역 간격이 짧은 지하철과 다르게 대부분 지상에서 운행하며, 역 간격도 상대적으로 더 길며 먼 거리까지 갈 수 있다. 장거리 기차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함께 운영한다.) 아이들은 빠짐없이 형광색 조끼를 입기 때문에 식별하기는 아주 쉬워, 먼 거리에서도 눈과 귀로 식별이 가능하다. 그렇게 아이들이 우르르 함께 다니면 어른들은 으레 길을 비켜주거나 앉은자리를 양보한다. 심지어 3세 이하의 유아들의 경우, 선생님들이 '수레'처럼 생긴 카트에 여러 명의 아이들을 태워 다니기도 한다. 옹기종기 모여 이동 중인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출퇴근길에 소풍 가는 아이들 무리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대단한 곳을 가는 게 아니라, 유치원 근처 동물원, 식물원, 공원, 도서관, 혹은 과학관등으로 간다. 그것도 버스로 두 정거장, 지하철로 한 정거장, 이런 식으로 보통 몇 킬로 미터 반경 내에서 움직인다. (그러다 한 번씩 도시 반대편으로 훅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일상의 범위에서 부모들이나 보호자들의 틀을 벗어나,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탐험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이들의 간식 역시 정해진 틀이 없다. 우리 집 역시,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전부다. 혹시 친구들과 함께 가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지난번에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는 게 있었다던지, 전적으로 아이의 선택에 맡긴다. (물론, 달달한 간식을 잔뜩 가지고 간다고 하면 다음 치과 진료를 위해서라도 말려야 하겠지만.) 한 번은, 한국식 '어육소시지'와 비슷한 간식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하길래, 가방에 하나, 주머니에 하나, 외투에도 하나, 그렇게 곳곳이 찔러 넣어둔 적은 있다. 그러나 유치원 측에서도 빵이나 음료 등의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기에 사실 개인 간식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셈이다.


아이가 첫 번째 소풍을 간다고 했을 때, 우리 부부는 너무 유치원의 소풍을 한국식으로 생각해 이곳의 사정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동물원을 간다고 하는데, 그 여러 명의 아이들을 어떻게 몇 명의 선생님이 인솔을 하는지, 중간에 힘들게 하는 아이들까지 감당이 되는 건지, 먹는 건 어떻게 되는 건지, 애들끼리 싸우지는 않을지, 염려가 염려를 앞섰다. 그러나, 소풍을 담은 사진을 건네받고, 아이에게 이야기로 전해 듣고, 길을 가다 만나는 아이들의 무리를 직접 보며, 우리 부부도 이네 이곳 아이들의 유난스럽지 않게 평범한 소풍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아 이렇게 평범하게 특별할 수도 있구나.' 목에 GPS추적기를 매달아 보내기도 하고, 몇 분 간격으로 들여다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건 감시의 수단이 아니다. 아이가 소풍을 다녀온 뒤 재잘되는 소리에 장단을 맞춰주기 위함이다.


결혼 전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대중교통에서 처음 봤을 때 참 신기했다. 저 나이의 아이들이 부모 없이 몇 명의 선생님에 의해 인솔되는 것도 신기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신기했으며, 의외로 침착하게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신기했다. 넉 놓고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전거, 대중교통, 혹은 차로 유치원까지 직접 데려다주는 것이 일상인 이곳에선 아이들이 대중교통을 빨리 접한다. 스쿨버스 문화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아파트 단지 문화가 없어서 일수도 있다. 혹은, 버스에 계단이 없어서, 유아차가 들어갈 넉넉한 공간이 있어서 일수도 있다. 다양한 환경의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 역시 대중교통의 일상모습 중 하나이다.


지난번 소풍 후, 아내가 평소보다 일찍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날은 마침 내가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다줬는데, 방수는 기본, 두 겹 세 겹까지 껴입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왠지 너무 춥게 입은 것 같은 우리 아이가 마음이 좀 쓰였다. 출근길에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조금 일찍 데리러 간 것이었다. 생각보다 유치원 전체가 너무 조용해 의아해했다고 한다. 들여다보니, 추운 날씨에 고생을 한 아이들이 빠짐없이 모두 낮잠에 곪아 떨어진 것이었다.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에 관계없이 씩씩하게 뛰어놀고, 푹 쉬는 것 이상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오후가 되면, 따뜻하다 못해 절절 끊는 바닥에 딱 붙어 낮잠을 푹 잔 아이들은 아침 마냥 활기차게 놀 것이다.


우리 집 아이는 이번 주에 다시 소풍을 간다.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소풍이다. 이번엔 상어를 보러 아쿠아리움에 간다는 아이는 간다는 생각만으로 벌써 설레는 모양이다. 동네 산책 가듯 대중교통으로 우르르 소풍을 가는 아이에게 그저 춥지 않도록, 감기 걸리지 않도록 단단히 입혀 보내는 게 전부다. 혹시 달달한 간식을 가져가고 싶다면, 그것도 모자라지 않게 넉넉히 주머니에 넣어 줄 것이다. 엄마, 아빠의 품을 떠나 친구들과 선생님과 도시 곳곳을 누비는 아이에게 어떤 든든한 저녁 식사를 대접할지 고민을 해야겠다. 잠드는 순간까지 아이의 하루가 더욱더 흐뭇하게 끝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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