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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하 Jan 11. 2022

만개한 매화 아래 밤 나들이: 하츠우메코

효고 매훈당

2월 말, 매화가 피는 시기를 따라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낮에는 찻사발 감상 강좌를 듣고, 어쩌다 보니 그릇들도 좀 쇼핑을 해 버렸지요. 늘어난 짐에 굽이굽이 대중 교통을 이용해 숙소로 이동할 때 즈음에는 다들 녹초가 되어, 그냥 얼른 이 짐을 내려놓고 방에 눕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 참이었습니다.


달이 하늘에 하얗게 뜬 밤중이었어요. 아직까지 날은 다 풀리지 않아 차가운 기운이 맴돌고, 정원이 아름답다는 숙소까지 시골 길을 걸어올라가는 도중에 길 가에는 매화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아, 그 풍경은 그야말로 별천지. 커다란 매화 나무가 몇 그루나 우거져서 모든 가지가 밤 속에 한껏 하얀 꽃잎을 틔우고 있는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다들 힘든 것도 잊고 그만 자리에서 멈춰,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그 아래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화 향기는 어둠 속에서도 풍겨 오는 암향(暗香)이라고 하던가요. 하지만 그날 매화는 달빛 아래 너무나 선명히 흐드러졌고 향기는 어둠이 아닌 그 모습 자체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효고 현, 매훈당(梅薫堂)에서 가게의 대표 향으로 내세우는 하츠우메(初梅香)는 아마도 그런 선명한 매화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매훈당의 시작은 1850년, 에도 시대 아와지시마(淡路島)에서 배를 가지고 물자 수송과 도매를 하던 일곱 집안 중 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도매 일을 겸하면서 부업으로 향을 제조하다가 이 중 몇몇 상품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고 4대째부터 향 만들기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매훈당' 이라는 상호가 등장한 것이 1926년이니, 그때로부터도 벌써 백여 년이 지난 오랜 가게인 셈입니다.


이런 매훈당에서 대를 거듭해 이어 오면서 개량된 비전(秘傳) 바로 이 하츠우메(初梅香)인데요,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달고, 맵고, 쓰고, 시고, 짠 다섯 가지 맛(五味)을 모두 맛볼 수 있는 본격파 향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백단, 침향, 사향을 조합해서 만든 향이라고 하는데, 먼저 상자를 열면 통상 백단이나 침향 같지 않은 산뜻하고 화려한 꽃 향기가 납니다. 향조로 말하자면 옥초당의 대표 상품 중 하나인 향수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까요.


불을 붙이기 이전부터 심상치 않은데, 피워 보면 그야말로 '아름답다' 고 할 만한 조향이 집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보통 전통 향에서 기대하는 절간 향 같은 것은 전혀 아닌, 화려하고 새초롬하게 빚어진 향긋한 꽃 향기. 첫인상은 마치 벚꽃 소금절임이나 과육이 젤리처럼 응결될 정도로 졸인 매실 절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쪽이나 졸이거나 절인 것을 보면 밀도는 빡빡하고요. 탄력이 있을 정도로 올을 밀어넣어 두텁게 짠 매끈매끈한 명주 같아요.

 

이렇게 빡빡하지만 또 이 퍼지는 인상은 널리 펼쳐지는 구름 같습니다. 밤의 매화 향기가 멀리멀리 퍼져 바다까지 가고, 그 바다에서 다시 소금 향을 실어와 부는 꽃과 소금의 향기. 그런가 하면 톤은 살짝 건조해서 구운 빵 냄새도 나고 그 바람에 잘 마른 겉옷 같기도 합니다. 침향의 단맛이 깊숙하게 깃들어 있는가 하면 상큼하고 시원하기도 한데, 시원할 때는 백단 기조의 산뜻하고 신선한 풀 향, 그리고 어딘가 매콤한 후추 향을 닮았습니다.

    

달고, 맵고, 짜고, 신 이야기를 벌써 다 했네요. 확실히 한 가지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향조입니다. 달고 매운 침향이 있는가 하면 시원하고 부드러운 백단이 받고, 그런데 그 부드러움에 이어지는 오일리한 머스크 향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새큼상큼한 인상은 여전해서 계속 맡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날 밤, 만개한 매화나무 아래서 저는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나무 옆을, 아래를, 또 옆을 맴돌며 자꾸자꾸 매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향은 그런 밤중의 빠져들듯 수많은 매력을 가지고서, 가만히 맡고만 있어도 새록새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네요.


향 한 줄기로 그날의 밤 나들이가 떠오르다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향 하나의 이야기로 여러분께  기억을 전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참 멋진 일이 아니겠어요!




* 매거진의 모든 리뷰는 주관적 감상이며, 가게 연혁 등을 직접 인용하지 않는 이상 제가 즐기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옮깁니다. 따라서 현재 시점과 다르거나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을 시 알려 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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