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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Sep 28. 2022

쌀쌀한 가을이면 밥상에 오르던 오징어 뭇국

그녀는 과연 내가 아는 엄마였을까?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이다 알게 되었다. 엄마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는 사실이다. 새까맣게 탄 피부에 장난스러운 눈망울을 빛내던 나는 사진 속에서 늘 친언니와 사촌들과 사이였다. 건설업의 바람이 불던 시절 타지로 나간 아버지의 빈자리는 엄마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냈다. 인생의 절반을 지난 지금 알게 된 이 사실에 질투심이 바싹 타오르진 않지만 적어도 어릴 땐 그랬다. 언니의 손안에 쥔 물건과 나의 주먹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음표를 떠올리곤 했다. 언니의 사진첩 속엔 수수하고 앳된 엄마가 아기를 안고 늘 해사하게 웃었다. 삶에 찌들고 고단함이 묻어나지 않는 그 여인의 모습을 바라볼수록 어딘가 점차 낯설어졌다.     



어른이 될 때까지 나는 꽤 낙천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학교 혹은 직장에서 단체생활을 해야 하기에 본인도 모르게 만들어낸 가면이었던 것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나는 꽤 불안하고 예민한 아이였다. 창문 밖에서 수상한 소음이 들려오면 심장이 쿵 쾅 쿵 쾅 뛰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귀에 점점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그럴 때면 득달같이 엄마에게로 달려가 묻곤 했다. 어떤 날에는 그 소리가 배기량을 높인 오토바이이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엔 소독차이기도 했다. 잘못 울린 소방 경보음에 놀라 가축처럼 움츠러든 내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소방훈련이라 말했다. 혼란과 불안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어린아이인 나는 엄마를 통해 삶을 구분 짓고 배우는 법을 터득해갔다.     



더 넓은 세상을 알면 알수록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졌다. 정작 나는 엄마를 잘 몰랐다. 둘째인 내가 태어나기 이전 언니와 함께하던 그 시절들을 나는 모른다. 하얗고 네모난 병실에서 하반신 마취로 아기를 처음 만난 엄마가 흘린 눈물의 의미도 헤아리지 못한다. 할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사형제로 자라던 소녀시절 엄마는 어떤 추억들로 물들었을지 알 수 없다. 가끔 이모들에게서 “네 엄마가 어릴 적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이야기 속 고집 쌔고 엉뚱한 소녀가 어떻게 억새고 고지식한 엄마가 된 걸까 실감 나질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내 멋대로 엄마를 정의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낳아주었다는 이유로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그녀의 삶이 그저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만의 “엄마”는 분명 존재한다. “엄마”하고 떠올리면 입안에 군침이 돌아 없던 식욕이 되살아난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엄마는 가을무를 사 와서 오징어국을 끓이셨다. 다시마와 얇게 저민 무를 넣고 뭉글할 때까지 끓이면 오징어에서 고운 분홍빛이 돌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에 흰쌀밥을 말고 호호 불어 국물까지 다 비우면 무엇이든 새로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시장에서 사들고 온 검은 봉지 안에는 제철 바람과 일조량을 맞은 과일들이 새로 오고 또다시 갔다. 풀 먹여 바삭하게 빨아놓은 광목이불을 덮던 순간에도 엄마의 손길이 그곳에 있었다. 꼭 안으면 물컹하게 흐르던 엄마의 살결 속 냄새는 지금도 코끝을 자극하는 것만 같다. 나의 엄마는 유별난 추억이 아닌 감각 속에서 서로 이어져 흐르고 있었다. 엄마의 태토가 묻어 나온 투박한 손길은 지금까지도 곁에서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내게 엄마는 매년 한결같은 분이셨다.


 다사다난했던 그녀의 인생에는 매년 다른 “나”가 찾아왔을 것이다. 엄마와 함께한 세월 동안 서른아홉 번의 엄마가 오고 또 갔다. 그녀들은 전부 누구였을까. 엄마의 긴 인생 속에 아주 짧은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인데 그녀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어쩌면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 인지도 모른다. 매 순간 나를 견뎌내어 주는 사람들을 나는 사랑하려 한다. 이제는 나의 곁엔 두 딸들이 있다.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나의 생활로 들어온 아이들이 내 옆에 앉아있다.               

 


아이들은 성장하며 매 순간 다른 사람이 되어 내게로 온다. 단지 변하지 않은 건 세 글자 이름뿐이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고 낯선 여행을 길에 나선다. 오늘은 정육점에서 두툼한 돼지고기를 사 왔다. 핑크빛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가 잘 스미도록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노른자를 풀어 넣은 튀김가루와 빵가루를 오가며 옷을 입혀 기름 속으로 풍덩. 집안은 어느새 기름기 가득 고소한 향기와 소리로 가득하다. 현관문을 열고 날아온 아이의 입속에 낙엽처럼 바삭한 돈가스를 후후 불어넣는다. 신이 난 아이는 풀벌레처럼 집안 곳곳을 뛰어다녔다. 묵묵히 살아낸 순간들을 속에서도 저절로 스며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익숙해졌다가도 언젠가 스며 나오는 순간들이 있다. 뚝뚝 배어 나온 사랑의 흔적들을 오래도록 사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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