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한 놀이동산은 국내에서 태어난 쌍둥이 판다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푸바오의 동생 판다들은 그 귀여운 외모가 똑 닮아 둘을 구분하는 일로 화재가 되었다. 쌍둥이들은 난 "U"자와 "V"자 검은 무늬를 통해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온종일 우리 안에서 대나무를 먹고 놀고 자는 판다들은 시종일관 귀여운 미소를 잊지 않았다. 제한된 환경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판다들에겐 지루함을 이겨내는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재미는 느낀다' 하고 '지루함은 견딘다' 표현한다. 견딘다는 건 일정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을 버텨내는 일이다. 24시간 사람들이 공존하는 스마트폰 안에선 쉴 새 없이 쇼츠와 개인방송 혹은 쇼핑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버스를 기다리던 터미널이나 병원 환자 대기석에서도 더 이상 지루함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지루함'은 현대인들에게 점차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은 잠시도 심심할 틈이 없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모래놀이가 아이들의 소근육과 창의력에 좋다고 하지만 종종 성분을 의뢰하면 크롬, 납, 카드뮴, 중금속이 검출되기도 한다. 황사나 미세먼지 혹은 도시개발 오염으로 인해 아이들이 온전히 뛰어놀 실외 공간이 줄어들고 있다. 더불어 아이들을 위한 전용 실내 체험공간이나 키즈카페가 발달하고 있다. 반짝이며 소리를 내는 현란한 놀이기구와 컬러풀한 장난감이 즐비한 그곳에선 누구나 심심할 틈이 없다. 그런 공간이 익숙해진 아이들은 흥분과 활기로 가득 찬 놀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곳 신도시에선 방학이 시작되기 한 달 전, 스케줄을 블록처럼 나눠 요일별 방학특강을 신청한다. 인기 있는 곳은 하루 만에 마감이 된다. 골목놀이 문화가 사라진 요즘 방학 때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함께 수업을 신청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매미의 울음소리처럼 끝없이 계속되던 어느 여름방학 날이나 혹은 일요일 오후처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지루함의 경험이 점차 부족한 이유이다. 아이들에게 게으름과 여유가 허용되던 어린 시절이 과열된 사교육 시장 경쟁 속에서 바쁘게 스쳐가고 있다.
어릴 적 부모세대는 뭐든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셨다. 이 한 문장은 살면서 내내 지배적인 가치관을 형성했다. 한국사회에서 '바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가끔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를 자랑처럼 늘어놓기도 한다. 특유의 '바쁜 성질'이 마치 존재의 빛나는 가치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반면 한가하고 느리게 사는 사람들을 '백수'라 낮춰 부르기도 한다. 성실과 바쁨만이 미덕이며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겨지는 현실이 지루함을 더욱 견디지 못하게 한다.
바쁘게 일하는 동안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다. 일자리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일하지 않는 동안 몸은 덜 힘들어도 정신적으로 고달프다. 고용이나 앞날에 대한 불안 더하기 인간의 실존적인 '공허와 무상함'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루함과 대면하기 겁내는 또 다른 이유인지도 모른다.
지루함이란 자극이 없고 순수한 '무'의 상태이다. 태초로 돌아가 먹고 자며 놀기를 반복하는 어린 아기들의 기본값과 비슷하다. 한 다큐멘터리에선 아이들이 지루할수록 창의력이 올라간다고 한다. 그 텅 빈 상태에서 호흡과 자아에 집중하는 동안 뇌는 쉬며 새로운 생각들을 발현해 낸다고 본다.
여운과 만족이 오래도록 긴 행복은 여행이나 쇼핑처럼 외부로부터 쉽게 살 수 없다. 올곧고 가득 찬 잠재의식 속 자신과의 만남과 오랜 지지로부터 생성된다. 은근한 자기혐오나 부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온전히 포용하고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진지한 물음의 시간은 살면서 쉼표처럼 꼭 필요하다. 살면서 지루함을 곁에 두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의 평온함과 여유 또한 능력이 될 수 있다.
(사진.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