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 가면 항상 TV가 켜져 있다. 주로 뉴스 아니면 드라마가 나오는데, 볼 때마다 드라마 내용이 비슷비슷하다. 친정에만 가면 시간이 멈춘 기분이랄까.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봤던 것 같은 드라마가 올해도 또 나온다. 죽지도 않고 또 왔다는 각설이가 떠오른다.'회장님', '본부장님', '욕심 많은 사모님', '든든한 조력자', '속 터지는 빌런'은 기본 안주처럼 꼭 등장한다. 그 와중에 회장님의 귀한 아들은 왜 항상 엄마가 싫어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건지. TV 앞에 5분만 앉아있어도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까지 대충 알 것 같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엄마 아빠는 예언가라도 된 것처럼 다음 상황이나 대사를 기가 막히게 안다.
"쟤 임신한 것 같은데?"
(잠시 후)
"거 봐! 밥 먹다 화장실 뛰어가잖아."
"미안해요. 우리 헤어져요."
(주인공이 똑같이 말한다.)
"크~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보나 싶을 때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아빠는 리모컨을 잡는다.
"자, 이제 MBC 틀어야지."
채널을 돌리는 장면을 안 봤다면 나는 아까 그 드라마를 계속 보는 줄 알았을 거다. 거기서 거기, 그렇고 그런 얘기가 또 흘러나온다.
나는 드라마를 잘 안 본다. 본방 사수하며 챙겨보자니 꼭 결정적인 장면에서 끝나 감질나는 게 싫고, 그렇다고 OTT로 몰아보자니 16부작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려서 싫다. 차라리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몰입해서 보고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 스몰토크에 못 끼는 경우가 꽤 있다.
친구가 "어제 '나는 솔로' 봤어?" 하면
"그게 드라만지 예능인지 먼저 알려줘." 하며 분위기를 깨는 친구가 바로 나다.
그러던 내가 요즘 드라마에 빠졌다. 시작은 입원이었다. 다리를 다쳐 수술하고 2주 정도 입원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나 때우자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본 드라마는 <우리들의 블루스>였는데, 혼자 새벽 2시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정주행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우리들의 블루스>를 추천했던 동생에게 카톡을 했다.
"다음 드라마 추천해 줘."
동생의 드라마 취향이 나랑 꽤 비슷하다는 판단하에 한 연락이었다. 동생이 두 번째로 추천해 준 드라마는 영 재미가 없었다. 그 지루한 병원에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보다 말다 하며 꾸역꾸역 2회까지 보다 포기하고 말았다. 드라마 관계자들에게 미안하니 그 작품의 제목은 비밀로 하겠다.
퇴원 후에도 나의 드라마 사랑은 계속됐다. <별에서 온 그대>, <재벌 집 막내아들>, <수리남>, <나의 해방일지>를 차례로 끝냈다. <별에서 온 그대>를 볼 때는 무심해 보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꼭 나타나 천송이(전지현)를 구해주는 도민준(김수현)에게 설렜고, <재벌 집 막내아들>에서는 재벌가 어른들을 쥐락펴락하는 진도준(송중기)을 보며 통쾌해했다. <수리남>은 주인공이 언제 총 맞아 죽을지 몰라 가슴 졸이며 봤고, <나의 해방일지>는 내가 손석구 배우에게 입문한 작품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돈 떼먹은 여자에게 소리 지르고 욕하는 남자가 멋있어 보이긴 처음이었다.
확실히 드라마는 비현실적이다. 400년 동안 늙지도 않고 살아가는 초능력자 외계인이 나오는가 하면 멀쩡하던 사람이 웃기지도 않는 사고로 죽는다. 천억, 이천억이 누구 집 개 이름처럼 쉽게 오가고 대박과 쪽박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든다. 그 뿐인가. 전지현은 우느라 마스카라가 광대까지 번져도 예쁘기만 하고 송중기는 개고생을 하고 죽다 살아나도 멋있기만 하다.
예전에는 드라마가 비현실적이라 싫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보고 있을 필요를 못 느꼈다.그런데 알코올중독자 손석구를 보며 마음이 설렐 때 확실히 알았다.
'사람들은 드라마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보는구나.'
적어도 나는 그랬다.
현실적인 거라면 현실에도 충분히 널렸다. 굳이 그걸 드라마에서까지 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더 이상 설레지 않을 때, 비현실적인 드라마 주인공들이 굳어가는 내 심장에 심폐소생술을 해준다. 대사는 또 왜 그렇게 주옥 같은지. 남주가 여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멘트들은 화면 밖 내 가슴까지 파고든다. 아, 스윗하기도 하여라.
이제는 엄마가 왜 맨날 비슷비슷한 드라마를 챙겨보는지 알 것도 같다. 엄마도 나처럼 드라마에서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현실에는 없는 것, 현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게 때로는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일지라도.
'엄마'와 '드라마'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0년 전쯤이었나. 내가 엄마 집에 머물다가 우리 집에 가려고 나설 때였다. 엄마는 TV에 눈을 고정하고 손만 흔들며 쿨하게 인사를 했다.
"<내 딸 서영이> 봐야 돼서 배웅은 못 한다. 잘 가!"
그 상황이 어이없어서 웃으며 한 마디 하고 나왔다.
"엄마 딸은 가든 말든 남의 딸 서영이나 잘 봐!"
그때는 드라마가 그렇게 좋을까 싶었는데, 드라마에 빠져보니 그 마음도 알 것 같다. 나 같아도 화면에서 손석구가 웃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집을 나가든 말든 안 보일 것 같으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처음에 비극들이 공연된 목적은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그런 일들은 자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 너를 울렸던 그런 일들이 인생이라는 좀 더 큰 무대에서 일어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분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이걸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드라마를 보는 목적은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보면서, 드라마에서 나를 설레게 했던 그런 일들이 인생이라는 좀 더 큰 무대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은 어떤 드라마를 볼까 쇼핑하는 마음으로 넷플릭스를 헤맨다. 내 인생도 드라마처럼 화려하게 빛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