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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an 22. 2024

노인을 마주치는 마음

늙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것


아직 젊지만 잔병이 많아 병원에 자주 들락거린다. 그날은 피부과와 호흡기내과 진료를 보는 날이었다. 피부과는 1호선 수원역 근처에 있다. 병원 예약 시간이 아슬아슬해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빠르게 걷는데 기둥 앞에 앉아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자는 칠팔십 대로 보였다. 딱붙는 털모자를 썼고 찬 바닥에 두 다리를 쭉 편채로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돈 바구니 대신 에이포용지 상자 뚜껑이 뒤집힌 채 놓여있었다. 상자 안에는 매직으로 굵게  '고  움'이란 세 글자가 정갈하게 적혀있었다. 누군가  이미 적선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놓여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날따라 나는 지하철을 타고 오며 내내 아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칠십 줄에 접어든 아빠는 3년 전 뇌경색이 지나간 뒤 부쩍 늙으셨다. 다행히 조기 발견해 큰 후유증은 없었지만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생겼다. 총명함을 잃은 눈, 적어진 머리숱, 나보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볼 때면 우리 아빠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걸음이 느려졌고 웃음도 줄었다. 얼굴에는 드문드문 검버섯이 피었다. 누가 봐도 아빠는 노인이었다.


아빠와 같은 연령대 남자가 추위에 맨바닥에 앉아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방 속에 있던 지갑을 꺼내 열었다. 다행히 천 원짜리가 한 장 있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 허리를 굽혀 상자 뚜껑에 지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미 숙인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면서. 손에는 등산 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빠는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산에 올랐다. 젊은 나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발이 빨랐는데. 슬픔이 더 번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피부과 진료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호흡기내과가 있는 큰 병원으로 갔다. 상급병원 내 호흡기내과는 암센터 그중에서도 폐센터에 위치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두리번거렸다. 나보다 어려보이는 환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나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년층이 대부분이었다. 호흡기내과다 보니 마스크를 쓰고 쿨럭이는 들이 많았다. 보통 배우자나 딸과 동행했다.


대기 공간에는 환자가 가득했다. 평소 자리가 좁으면 서있는 편인데 그날은 짐이 많아 한 할버지 바로 자리 나도 비집고 앉았다.

 

노인은 옆에 앉은 부인과 대화 중이었다. 할머니에게 뭐라고 말하는데 발음이 불분명하여 나에게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동고동락한 세월이 있어서일까, 할머니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간호사가 할아버지를 호명하자 그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대기자 전광판을 보니 다다음이 내 차례였다. 읽고 있던 책을 가방 속에 슬슬 집어넣으려는데 진료실 들어갔던 할아버지가 나왔다. 간호사는 유독 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다음 주는 검사하러 오실 필요 없고요, 약 떨어지면 오세요! 죠? 오늘 검사는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다음 주에는 오지 마세요!"


연거푸 당부하는 간호사를 뒤로 한 채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갔다.


중년의 간호사는 대기 중인 우리에게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저 할아버지가 글쎄, 백 세가 넘으셨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혼자 오신 건지. 걸음이 느려서 버스 타려면 몇 번이나 놓치셨을 거 같은데. 택시 타고 오셨나~"


그녀의 이야기에 대기석에 앉아있던 칠팔십 대 노인들이 웅성거리며 감탄을 내뱉었다. '백 세라고?' 나는 놀라서 할아버지를 눈으로 좇았다. 백 세 노인은 TV에서만 봤지 실제로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미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는 사람들의 응에 신이 났는지 동조를 구하는 듯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그렇게 오래 사셔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하신대요." 이번에는 몇몇이 웃었다.


"할아버지가 저한테 건강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안 그럼 병원에 자주 와야 한다고." 웃으면서 대답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였다. 부부가 아니라 처음 본 사이였던 모양이다.


간호사는 말했다. "백세 시대라더니 정말이네요."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던 노인들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병원 대기실 내 공기가 갑자기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구부정한 어깨로 지팡이를 짚으며 달팽이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작은 몸. 한 세기가 세 발로 느리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존경심이 일었다. 저 몸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을까. 혼자서 아픈 몸으로 오래 살아남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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