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빈대 이슈가 한 차례 오고 갔다. 그야말로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작은 것들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비단 작은 것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해마다 사람들은 늘어나는 바지 사이즈와 전쟁을 선포한다. 말캉한 허릿살은 좋아하던 이와 함께 줄 서서 먹었던 '추억'이자 '놀이'이기도 하고 숱한 격무 속에서 찾았던 '해방구'이기도 하다. 중년이 되자 나이 먹을수록 늘어가는 삶의 지혜와 경험치만큼 살이 비례해 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체중계 위에 올라서는 담대하고 초연한 마음은 늘 초라하게 막을 내리곤 한다.
살과의 전쟁이 점차 이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육체노동을 주로 하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는 기술집약적 하이테크 산업으로 구조가 바뀌었다. 노동에서 벗어나 편리함을 입은 몸은 이제 다이어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다이어트는 평생이다'라는 말처럼 현대시민에게 몸은 자기 관리의 표상이자 명함처럼 규정되었다.
살을 빼려는 욕망 반대편에는 찌우려는 욕망도 존재한다. 식품가공업은 산업화된 공장화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며 끊임없이 발전 중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굶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도시에선 어디든 눈을 돌리면 FNB(Food and beverage) 산업의 발달로 먹거리가 넘쳐난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달해 온 조리법은 또한 국경을 넘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우리 식탁에 오른 서양식 식습관과 고칼로리 디저트들은 사람들의 '미식의 기준'을 더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질병으로 인식될 만큼 심각한 비만 인구는 또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해 먹은 음식들이 몸에도 좋을까.
자꾸만 음식을 찾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비만의 핵심은 꺼지지 않는 식욕 버튼에 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육체적 허기와 심리적 허기로 나뉜다. 실제로 굶주림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먹는 경우도 있다. 보상받고 싶은 여러 마음을 뭉뚱그려 음식에서 찾곤 한다. 기존에 없던 허기를 외부에서 자극받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음식에 대한 유혹이 많이 받는다. 버스를 기다리던 전광판에서 먹음직스러운 육즙을 자랑하는 거대 햄버거가 지나가는 걸 넋 놓고 바라본 적 있다. 마트를 지나갈 때면 삼겹살을 굽는 지글지글 소리와 냄새로 인해 생각에도 없던 고기를 구매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푸드 판타지는 우리의 눈과 코와 귀를 향해 시시각각 정보를 흘려 구매를 유도한다. 주문 버튼을 누르면 바로 배달되는 물류 시스템도 여기에 한몫 더한다.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라면 언제든 꺼내먹을 수 있게 공산품들을 비축해두곤 한다. 시시각각 배고픔의 버저를 누르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빠르게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방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빠르고 값싸게 대체되는 식품을 먹이는 행동은 과연 안전할까. 하루동안 무심코 먹었던 행동들을 좀 더 관찰기록하며 명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생각하지 않고 살다 보면 나도 모르고 먹게 되는 식품첨가물들이 의외로 많았다.
한편 비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들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첨단 기술의 발달만큼이나 다양한 다이어트 비법들이 발명되고 있다. 간헐적 다이어트와 탄단고지 다이어트 혹은 해조류만 먹는 지중해식 다이어트 등을 한 번씩 시도해 보는 것도 새로운 풍조가 되었다. 단순히 살을 빼는 미시적인 일이 거시적인 산업이 되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전기차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머스크 또한 '위고비'로 13킬로를 빼서 화제가 되었다. 당요약 주사제를 비만약으로 허가받아 출시한 '위고비'는 어느덧 거대기업의 창업자가 사랑한 약으로 명성이 자자해졌다.
온순한 얼굴을 한 비만이란 질병의 숨겨진 얼굴은 무엇일까. 일부 사람들은 비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주 당뇨병 주사제를 맞거나 위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기도 한다. 살을 빼기 위해서 단순히 식욕을 억제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단기간의 다이어트라면 상관없겠지만 건강을 목표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땐 단순한 식욕 억제만으론 어려워진다. 욕구라는 게 늘 마음먹은 대로 조절하기 쉬운 일이라면 아마 수많은 심리상담가와 정신과 의사들이 직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적게 먹고 운동하면 다 빠진다”, "비만은 게을러서 그렇다"는 일부 사람들의 단순한 사고는 비만인들을 향한 날 선 시선에 날카로움을 더한다. 실제로 비만은 많이 먹거나 적게 운동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 대사능력에 달려있다. 대사는 우리의 몸이 먹은 음식을 에너지로 소비하는 능력이다. 사람들의 지문이나 홍체가 다르듯 타고난 대사능력 또한 다르다. 대게 나이나 환경 혹은 유전형질에 따라서 달라진다. 대사력에서 오는 차이는 '먹은 만큼 운동하면 다 빠진다'는 공식이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성취'와 '도약'에서 빠르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해 왔다. 그 누구보다 빠른 인터넷 강국 된 뒤에는 그보다 더 발 빠른 국민들이 살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빨리빨리 사는 삶이 과연 다 좋은 것일까' 여유를 갖고 생각해 보고 싶다. 지문인식으로 결제한 배달앱에서 배달받은 식사에는 과연 얼마의 당분과 염분이 들어있으며 어디에서 재배된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모두들 블라인드 심사위원처럼 가리어져있다. 가끔 뭘 몰라서 먹을 수 있는 식품들이 있다. 실제로 한 번은 유명식당에서 조리하는 레시피로 집에서 요리를 한 적 있었다. 설탕스푼으로 넣고 또 넣고 상상할 수 없는 양이 들어가는 걸 보다가 결국 다 넣지 못했다. 내 몸을 위해 요리하는 음식에 내 손으로 조미료를 넣으려니 저항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직접 요리해 보기 전에는 몰랐던 단골집의 비밀 레시피였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기술중심 비대면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인간 간의 소통도 점차 온라인화 되고 AI나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점차 사람이 배제되어 가는 기분에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일의 온도'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본다. 이젠 요리마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조리된 음식을 얼굴 없는 이의 손에 배달되어 먹는 일이 흔해지고 있다. 정이 넘치던 과거 사회로 돌아가자고 어깃장을 부리는 게 아니다. 직접 내 손으로 조리해 믿을 수 있는 안전한 먹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음식이 식탁 위에 올려져 위를 통과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연무처럼 가리어진 먹거리 산업에서 점차 비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건 '먹는 양'이 아니라 '무얼 먹는지'가 될 것이다. 간단한 방법이 바로 요리이다.
요리는 사람의 기운을 북돋는다. 요리에 기운이 담기기 때문이다. 정성스레 손으로 빚은 만두와 먹는 떡국은 새해의 기운을 담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아홉 가지나물, 귀밝이술을 먹으며 한 해를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원하기도 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한 해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오곡밥을 지어먹었다. 음식을 지어먹는 일은 과거 복을 비는 행위였다. 이러한 요리는 신선한 제철 재료를 직접 고르는 일부터 시작된다. 피할 수 없는 가공식품은 식품정보란에 적힌 표시를 읽어보고 어디에서 무엇으로 재조 되었는지 갖는 관심 하나가 광고의 홍수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선택권을 주기도 한다. 흐르는 물에 씻고 칼로 잘라 다듬으며 코에 전해지는 향기와 손으로 만져지는 질감은 식감과 오감을 자극한다. 어떤 식단이 되었건 스스로 해 먹으며 몸이 재료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는지 오랜 관찰이 필요하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조리법을 바꿔가며 본인의 대사능력에 맞춰 영상소를 더 넣거나 덜어가면서 레시피를 완성한다. 인생을 살아가며 '나'라는 내면과 사귀어가듯 '내 몸'을 알아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직접 손으로 요리하는 일에는 한 동안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살을 빼던 노력이 아닌 만족스러운 나의 모습을 위해서 건강에 집중할 때 다이어트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일 수 있다. 건강하게 내면으로부터 차오르는 힘은 정서적인 허기와 무력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집안 환경을 바꾸는 것 또한 도움이 된다. 네모난 냉장고와 팬트리 속을 채운 음식들을 꺼내서 나만의 기준을 세워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직접 몸을 움직이며 식품이 우물 안에 고인 물이 되지 않게 지속적인 솎아내기를 한다. 시간적 여유로움을 갖고 직접 몸을 움직여 살림을 돌보는 일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충동적인 허기로 인해 냉장고를 여는 순간 마음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필요하다.
먹방을 보고 각종 맛집에 줄을 서서 먹는 행복감은 피로사회에서 종종 아편제로 작용하곤 한다. 진정한 위로와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일까. 오래도록 은근하게 지속되는 위로는 결국 자신의 손에서 실현될 수 있다. 직접 나를 돌볼 수 있는 힘으로 자족하는 삶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기본적인 일을 남에게 기대어 살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 그 시작이다. 돌아보니 나는 지나오는 계절동안 얼마나 자주 타인의 손을 빌려 값싸고 빠른 끼니를 때웠던가 돌아본다. 남에게 더부살이해 오던 날들에게 해방을 외쳐본다. 진정한 사랑은 독립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나의 독립을 돕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간단한 행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화면을 늘리고 자판을 두드리던 작은 이 두 손으로 칼등을 눌러 요리를 하는 경이로움의 날들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이제는 미식과 외식 대신 일일일식 직접 요리를 실천해 보는 건 어떨까.
<섭식과 다이어트는 개개인의 몸에 따라 적용되는 방식이 다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의견임을 덧붙입니다. 사진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