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은 Jan 09. 2021

이해를 바랐던 J에게

나의 사랑 나의 친구 #3

<나의 사랑 나의 친구>

#이해를 바랐던 J에게


*너무 오랫동안 산문을 쓰지 않았더니 기분을 말하는 일이 낯설어진다. 단어들이 잘 정리되지 않는 느낌이다. 계속 쓰는 것 말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쓴다.
나의 사랑 나의 친구 시리즈를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영화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고 났을 때, 돌아본 이야기들이 한 편의 영화같기를 바랐다. 반짝이는 장면들이 군데군데 있어 그리 슬프지만은 않은 아름다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면 ‘아주 잘 살았다’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J와의 만남은 영화같았다. 만남 자체로 나를 이제 막 시작되는 영화의 오프닝 씬으로 밀어넣었다. 처음부터 의미심장 복선과 상징들이 장면마다 떠다녔다. 그것들을 잡아 의미를 부여하는 일들이 즐거웠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문학의 역사와 늘 맥을 같이 해왔지만 여전히 누구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J와 나는 당당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같은 결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는 동일하다고 믿었고, 동일한 언어를 주고 받는 사이에서 결핍되어있던 것들이 충족되는 벅차는 순간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어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우리의 언어에는 빈틈이 많았고 껍데기가 많았고 그것들이 서서히 신뢰를 부수어갔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사실은 자만이었고, 오해에서 비롯된 이해였다. 확신에 찾던 그 대답에 자신이 없어졌다. 


J는 나를 자신과 같다고, 나는 J를 나와 같다고 맹신했던 것이 균열의 근원이었다.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던 퍼즐조각이 오히려 서로를 다치게 하는 날카로운 유리조각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우리는 어떤 생각도 편히 나누지 못했다. 방어벽을 세우고 구덩이를 파 진짜 의미를 숨기고 속이 빈 표현들을 주고 받았다.


두 명의 감독이 있는 영화는 여기저기 편집점이 엉키며 엉망이 되었다.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었고, 이미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다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J는 서로를 떠나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내가 애정을 쏟은 존재가 나를 떠나려 한다는 게 실감나려 할 때 나는 차라리 나를 파괴한다. 내가 아름답다 느끼고 어루만지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서 나를 단단히 지탱해주던 것들을 스스로 깨부수고 고립을 택한다. 차라리 아주 불쌍한 사람이 되어서 대체 무엇때문에 이렇게 괴로운지를 잊고 그냥 나는 원래 불쌍한 사람이지, 하는 감정만 남기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곁을 괴롭게 하는지, 나를 외롭게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때때로 극한의 감정 속에서 나를 충분히 연민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떠한 감정적 돌파구가 되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같은 카드를 골랐고 스스로 영화의 엔딩을 아주 처절한 새드엔딩인 것처럼 마무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나는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고, 그리하여 어느 정도는 J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하게 되었다기 보다는 존중하게 되었다. J의 언어를, J가 살아가는 방식을.


그리고 불쌍한 주인공이 되는 것을 그만두었다. 우울함을 좋아하는 것을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가엽지 않고 약하지 않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심을 품은 사람들이다. 그게 이제서야 제대로 보인다. 사람은 이해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게. 스무살 때 썼던 문장이 이제야 시야에 완전히 들어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