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금지, 김치도 금지!

배에서 끝까지 생존하기

by 항해사 어름

혹시 평소에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드시나요, 아니면 주로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직접 요리해 드시나요? 요즘은 식재료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이라 마트조차 갈 일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달은 물론이고 식당, 편의점, 마트 전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냉장고에 쟁여둔 것들만으로 몇 달을 버텨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 일은 선박에서 아주 흔히 벌어지는 일상 중 하나입니다. 선박에서는 대체 어떻게 생존에 필수적인 물과 음식을 조절하는지, 그 비밀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주부식 계획의 중요성

선장(Captain)이라고 하면 보통 근사한 정모를 쓰고 멋지게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선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주부식 관리'입니다. (주부식: 선원들의 고기, 채소, 과일 등을 포함한 모든 식재료 제반)


선박의 총책임자로서, 선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과 음식을 적절한 시기에 보급하고 관리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LA에서 출항한 선박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2주가 소요되는데, 만약 주부식 재고 관리에 실패하여 3일 만에 식재료가 동이 난다면,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선원들이 밥을 아예 먹지 못하는 치명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식재료를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처음부터 충분히 넘치게 실어두면 안 될까요?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음식은 당연히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며, 특히 채소의 경우 3일에서 1주일 정도면 신선도를 잃기 때문에 관리하기 더더욱 까다롭습니다. 부식 창고의 식재료가 썩어 폐기되면, 이는 예산의 일부를 버린 셈이 되어 고스란히 선원들에게 피해로 돌아옵니다. 낭비한 예산 때문에 추후 그 선박에 보급되는 식재료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선장뿐만 아니라 선내의 모든 선원들이 주부식 관리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본인의 이기심 때문에 주부식 창고의 식재료를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것은 경위서를 작성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규 위반 사항입니다.


타의적 원푸드 다이어트

그렇다면 실제로 주부식이 부족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할까요? 물론입니다. 선장님들은 책임감을 갖고 늘 충분한 여유분을 두지만, 간혹 여러 변수가 생겨 주부식의 일부가 동이 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는 제가 겪은 것은 아니고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한 선박에서 부식 창고의 냉장 시스템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일주일간 냉장고와 냉동고가 모두 먹통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실온 보관용을 제외한 모든 음식들이 부패하여 폐기해야만 했고, 다음 보급까지 선내에 있던 라면만 삼시세끼 끓여 먹으며 간신히 버텼다고 합니다. 선원들은 이 기간 동안 예기치 않은 라면 원푸드 다이어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주부식 관리는 생존뿐만 아니라 선원들의 사기에 직결됩니다. 저 또한 직접 승선을 통해 깨달은 바지만, 식사가 부실하고 맛이 없을 때는 사기가 저하되고 업무 집중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주부식 계획 방식

그렇다면 그 중요하다는 주부식 계획은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선내에는 대체로 20~30명 남짓한 선원들이 있는데, 주방장은 이 인원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평균적인 섭취량을 파악하고 매일같이 소비량을 체크하는 습관을 가집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루 소비량을 계산하고, 다음 주부식 보급 예정일까지의 남은 일수를 곱하면 필요한 주부식의 양이 계산됩니다. 만약 부산에서 두바이까지 3주간의 장기 항해가 예정되어 있다면, 최소한 두바이에서 보급받기 전까지 3주 동안 먹을 양은 부산에서 싣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때 선원들의 국적, 종교 및 문화 또한 빼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인이 승선한 선박에서 이슬람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돼지고기를 잔뜩 실으면, 그 돼지고기는 아주 높은 확률로 올라온 그대로 갖다 버려야 할 잉여자원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한국 선원이 승선한 선박에서 '김치'는 한국인의 정신적 허기를 달래주는 핵심적인 '소울 푸드'입니다. 이 K-푸드가 동이라도 나는 일은 근무 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기 관리의 문제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장기간 고립된 환경에서 익숙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고된 업무를 버틸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 됩니다. 따라서 주부식 계획을 짤 때, 한국인 선원들의 'K-푸드' 재고 현황은 쌀이나 고기만큼이나 중요하게 관리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샤워를 금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김치는 없어도 된다고 치더라도, 생존에 있어 절대 없어선 안 될 것이 바로 물입니다. 음식은 안 먹어도 한 달은 산다고 하지만 물이 없으면 3일도 넘기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물은 '생존' 그 자체를 담당합니다. 심지어 물에는 음용수뿐만 아니라 샤워나 세탁에 쓰이는 생활용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박이라는 고립된 환경에서는 이 물조차도 제한된 자원이자 엄격한 관리 대상입니다. 우리 주변은 온통 물(바닷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물은 마실 수도 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박은 샤워하고 설거지할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조수기(造水機)'라는 신기한 장치를 사용합니다. 주변의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응축시키는 과정을 통해 생활용수(담수)로 전환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조수기라는 것이 공짜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선박에서 엔진을 가동할 때 생기는 열을 이용해 물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즉, 항해 중이 아니라면 물을 만들 수가 없으며, 추가적으로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하기에 항상 물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샤워를 못 하는 선원들의 꾀죄죄한 모습이나 빨래통에 빨래가 가득 쌓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이 조수기가 고장 났을 때입니다. 조수기가 고쳐지기 전까지는 여태 만들어 놓은 물로 다음 항만까지 버텨야 하니까요. 이를 위해 선장님께서 소위 'Water Control'이라는 비상대책을 지시하면 이때부터 전 선원은 물 사용량을 대폭 줄여야만 합니다. 샤워를 하는데 물이 안 나오고, 세탁기를 못 돌린다니. 그런 세상을 상상이나 해본 적 있으신가요? 물론 이제 막 배를 타실 거라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선장님을 비롯한 모든 선원들이 힘을 합쳐 매일같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음용수는 생활용수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운용됩니다. 주로 선박에서 식수로 쓰는 것은 주부식으로 보급받은 생수입니다. 각 선원은 매달 정해진 만큼의 생수를 보급받는데, 공용으로 업무 중 마시는 생수는 따로 보급해 주기 때문에 대체로 마실 물이 부족할 일은 많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선내의 생수가 부족해지면 선박별로 다양한 특별조치를 시행하는데요. 일반적으로는 생수 보급량을 줄이고 조수기로 만들었던 물을 보리차로 끓여 먹는 방식을 씁니다. 조수기로 만드는 물은 이런 비상시 외에는 음용으로까지 잘 쓰이지 않는 편입니다. 이는 세면대의 수돗물을 음용수로 잘 활용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아무래도 마시는 입장에서는 눈에 직접 보이는 생수병을 따서 마시는 것이 위생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고립된 시스템

항해사를 하면서 누구든 예외 없이 느끼게 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원을 통제하는 일의 중요성'입니다. 육지에서는 생활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어 특별함을 못 느끼던 것들이 바다 위에선 그렇게 처절하고 귀해보일 수가 없습니다. 주변의 몇 걸음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많은 라면 봉지들은 선박에선 식자재로써의 최후의 보루가 되기도 합니다. 무심코 수도꼭지를 틀면 콸콸 쏟아지던 물은 선박에서는 조수기로 하루하루 만들어낸 소중한 금덩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자원의 제한된 속성 탓에 배 위에서는 '누군가 해주겠지' 또는 '없으면 배달시키면 되지'라는 무책임한 기대가 통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하나하나 우리가 스스로 계획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재고가 어떻게 소진될지를 미리 내다보고 미리미리 음용 제한이나 생활용수 제한 등의 대책을 수립하지 않으면 뒷일을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항해사로서의 경험 이후에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육지의 시스템에 대한 감사함이 훨씬 깊어졌습니다. 무언가 실패하고 거리에 나앉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게끔 해주려는 사회의 노력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커다란 배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대한민국호에서 여러분과 같은 수많은 선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주고 있는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