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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바다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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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May 15. 2024

땅을 밟으니 멀미가 나는군요

꿀렁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땅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려다가 멀미가 났다.


 지난한 일의 여정이 끝났다. 벨기에 안트워프의 한 컨테이너 터미널이다. 읏-차. 배에서 내린다. 발바닥에 땅이 닿는다. 400미터 짜리 외딴 섬에 4개월 반을 살았다. 수많은 기계들 덕에 하루종일 덜-덜-거리는, 그 안은 진도 2 정도 되는 지진이다. 지진에 적응된 나는 웅크린 거북이마냥 가-만히 움츠린 땅이 낯설다.


 비행기 이륙까지 세 시간, 얼른, 덜-덜- 차를 타고 브뤼셀 공항으로 향한다. 오 다행히도 비행편이 지연되었다. 벨기에는 이 맥주가 유명하다던데. 한 병을 집어 벌컥벌컥 마신다. 난 절대 주량이 낮은 편은 아니다. 소주 한 병 정도는 그래도 마시는 편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좀 어지럽다. 머리도 아프고 구역질도 가끔 나온다.


 맥주 때문인가? 아니야. 어지러운 건 그 전부터였다. 적어도 차를 타면서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전이었다. 그럼 대체 이렇게 어지러운 이유가 뭐지. 그 흔한 차 안에서조차 살면서 단 한 번도 멀미를 해본 적이 없던 나였다.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니 멀미라는 것은 확실했다.


 원인을 파헤쳐볼까. 그 전까지 분명 내린다는 생각에 신났었다. 아주 멀쩡했다. 머리는 매우 맑았고 소화는 기가 막히게 잘 되고 있었다. 이 증상의 시작은 분명 내리고 난 뒤였다. 그렇다. 난 그 유명한 '육지 멀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체 진동과 흔들림, 물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기를 어느덧 130일 가량을 하다보니 어느새 내 몸이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비행기 승무원에게 멀미약을 달라고 떼를 쓴다. 확실히 혀 밑에 약을 대 놓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며 많이 나아진다. 이제 밥도 입맛을 다시며 먹은 후 앞의 화면을 꾹꾹 눌러대며 영화 목록을 염탐한다. 이 몹쓸 육지 멀미, 요놈이 결국 현대 의술에 굴복하고야 만 것이다.


 항해사들은 간혹 이렇게 장기간 항해 끝에 육지를 밟으면 육지 멀미를 경험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갑자기 땅이 흔들린다거나 여기저기로 기운다면 식겁하겠지만, 오히려 선원들은 땅을 밟으면 너무 이상하리만치 움직이지 않아 식겁한다.


 아주 멀쩡해진 모습으로 나는 어느덧 KTX 를 타고 용산역에 도착한다. 문이 열리자마자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마치 한 장의 바다와도 같이, 수놓은 꿈들이 파도를 치며 두둥실 움직인다. 대서양의 별들만 보던 눈에 별보다 더 큰 꿈들이 아른거린다. 이런, 사람이 너무 많군.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이제는 약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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