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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May 23. 2024

집 앞이 독일이었다가 영국이었다가

감쪽

 집 자체는 항상 똑같은 구조. 책상은 여기, 침대는 거기, 화장실은 저기. 창문은 이쪽, 옷장은 그쪽, 현관문은 저쪽. 분명 집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집 앞을 나서면 풍경이 매번 바뀐다. 그제는 한국이었는데 어제는 독일이 되고, 오늘은 영국이었는데, 내일은 벨기에가 된다.


독일 엘베 강 앞을 반겨주는 시계탑

 독일의 푸른 들판. 평화롭게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 시계탑을 저 높이 들어 올린 황갈색 벽돌들. 그 모든 것들이 어제 집 앞에서 보였던 풍경들이다. 새파란 하늘의 뭉게뭉게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며 해안가 누드비치의 서양인들에게 그림자를 내려준다. 까르르 웃으며 서로 물을 흩뿌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어제 내 앞에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이제 내 앞은 런던이 되었다

 오늘의 내 앞은 영국 런던 외곽의 황폐한 공사장. 듬성듬성 쌓아 올려진 흙더미, 저 너머 얼핏 보이는 영국 전통식 건물들의 아름다운 풍채가 보인다. 이제 차를 타고 30분만 나가면 보이는 타워 브릿지와 런던 아이, 그리고 황금빛의 빅 벤. 템즈 강물 위를 따라 영-롱히 빛나는 초롱초롱한 빛깔들, 마치 호기심 어린 여자아이의 눈빛처럼 빅 벤을 일제히 비춘다. 눈을 부시게 하던 그 금빛의 빅 벤도 오늘 내 앞에 있지만 내일은 없다.


세상을 두둥-실 떠다닌다. 바다 위일 뿐.

 영화 '업'에서 주인공 칼이 수천 개의 풍선을 집에 매달고 다녔던 것처럼, 우리 집은 세상을 두둥-실 떠다닌다. 집에 쌓인 추억은 옛날 그대로인데, 밖의 풍경은 적막한 사막이 되었다가도 들푸른 초원이 되었다가 한다. 우리 집은 햇빛이 창문을 내리 비추는 남향이었다가 어느새 해라곤 찾아보기 힘든 북향으로 바뀐다. 그렇게 우리 집은 계속 방향과 위치가 바뀐다. 바다의 물길이 안내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인도양 어딘가에서 창밖을 보니
대서양 어딘가에서
싱가폴 해협 어딘가에서
도버 해협 어딘가에서


 아침에 막 눈을 뜨면, 정말로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지금 여기가 한국인지 싱가폴인지. 독일인지 네덜란드인지. 그렇게 지금 여기가 어딘지 창문을 열어젖히고서야 인지한다. 아 여기는 한국이다. 오늘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배를 내리는 날이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짐을 챙겨 문을 박차고 나온다. 부산 앞바다가 영-롱히 빛난다.


 내가 이 두둥-실 떠다니는 집에 살며 느낀 것 또한 당신과 내게 아름다웠지만 당신의 집 앞에도 아마 이에 비견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집 앞에는 무엇이 보이시나요?


 음, 아마도 저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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