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가 된 은퇴 CEO : 인생 에세이(2)
누군가를 코칭을 하겠다면 나의 진심과 나의 삶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그래야 코칭을 받는 사람도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고 거기서 우리는 숨겨진 문제들을 더 많이 끄집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본격적인 ‘특별한 사유의 코칭’에 앞서 나의 진심과 나의 삶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건강 때문에 일찍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로 인해 쌓인 빚에 힘든 상황 속에서 아무런 수입도 없이 무작정 돈을 빌려 생활을 이끌어 가신 어머니가 전신의 힘을 쏟은 자식 공부에 대한 열정 덕분에 나는 안정된 사회인으로 성장하여 그 어려움을 청산할 수 있었던 시절을 지나왔다.
만약 내가 어머니였다면 그저 막막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이런 나의 평범하지만 한편으로는 비범한 서사에 대해 어느 순간 멈춰서 뒤돌아보고 정리하며 회고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한 켠에 싹을 틔우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내가 참여하고 있는 최고경영자 출신들의 모임인 사단법인이 대학교나 기업과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법인 회원들이 학부생, 대학원생, 직장인들에게 강의나 멘토링 등을 공익 봉사로 제공하거나 또는 보수를 받아 법인에 기부하는 소위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회원들 중 몇 명을 어느 유력 신문사 기자가 인터뷰하여 그들의 사회 경험을 현재의 리더가 미래의 리더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책으로 엮어 2016년에 발간하였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그 때 집필자인 기자의 요청으로 미래의 리더인 독자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를 손 편지로 쓰게 되었다. 나는 이런 얘기를 썼었다.
그리고 이 글을 준비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서사에 대한 해소 욕망이 다소 해소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고민 끝에, 이제 내 삶의 마무리에 가까워져 가면서 가치를 챙기는 활동으로 나타난 것이 코칭이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인생의 경험, 경륜, 깨달음을 자신의 서사를 들어줄 상대를 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로서 쓰이는 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코칭이란 어쩌면 지나간 내 청춘의 시절을 되짚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변화의 첫 출발은 자기 성찰의 사유와 인식에서 비롯된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성찰 전 단계 (precontemplation)에서 성찰의 단계 (contemplation)로 진입하게 된다.
이런 자기 훈련은 여러 기회에 무엇인가를 듣게 되면 지식의 확장을 위해 그와 관련된 정보들을 읽고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문득 깨닫는 바가 생기게 되는 과정을 거치는 활동이다.
코칭은 자기 변화를 강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기 훈련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누구나 젊으나 늙으나 살아온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인생에 대한 통(桶)으로서의 서사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직장 상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들어 줄만한 사람을 만나면 크던 작던 하나의 서사로 봇물처럼 토해 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을 들어 줄만한 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첫째로 내 얘기를 듣고 이해할 만한 지적 수준과 경험과 경륜을 지녔다고 느껴지는 사람.
대학생이 중학생을 앉혀 놓고 자기의 속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로 내 얘기가 주위 사람에게 빙빙 돌아서 어느 날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이 없게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
술 한잔 놓고 마음이 통하는 밤 온갖 얘기를 나누고는 그 다음날 아침 후회하는 기억들은 누구나 겪어 보았을 것이다.
셋째로 듣는 사람의 에고가 없이 오롯이 내 입장이 되어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
우리는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모인 자리에서 갑자기 마음이 동해 나의 작은 하소연을 꺼내면 흔히 뭘 그런걸 가지고 고민하냐, 누구나 다 그래, 나도 그런 고민해 봤는데 그럴 땐 이렇게 마음 정리를 하면 도움이 돼 등 듣는 사람이 자기 입장의 얘기로 반응하는 경우를 자주 대한다.
그런 경우 나의 느낌은 괜히 얘기 꺼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가 나의 얘기를 경청하고 그냥 공감해 주기를 바랬는데, 나를 아껴 주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물론 듣는 사람도 선한 의도로 도움을 주려고 자신이 아는 이런 저런 얘기를 꺼냈겠지만.
톨스토이의 3대 장편 소설 중 하나라고 일컬어 지는 안나 카레리나는 이런 첫 구절로 시작한다.
어쩌면 모든 행복한 가정도 모든 불행한 가정도 제각각 나름으로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행복, 불행. 어느 단어도 각자의 깊은 처지에 들어가 보면 모두에게 다 똑 같은 의미가 아니다.
노자 도덕경 첫 문장은 이렇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이 말하는 상대의 입장이 되어 공감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소리다.
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 얘기를 꾹꾹 눌러 담지 못하고 이런 사람을 찾고 있을까?
나만의 서사는 일반화될 수 없고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남들은 알 수가 없으며, 얘기한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내 마음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런 노력을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기에, 이렇게 ‘특별한 사유의 코칭’을 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