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가 된 은퇴 CEO : 인생 에세이(4)
내가 고등학교 때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 시민회관이라는 공연 건물이 있었다. 각종 행사도 하고 음악회 등 연주회도 하던 곳이다. 건물의 크기나 내부 시설의 훌륭함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보다 못 하지만 기능은 유사했다. 그곳에서는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정기적으로 있었고, 때때로 세계적인 연주가들의 공연도 열렸었다.
당시 17세 소년은 시민회관에서 학생 할인권으로 입장하여 관람한 연주곡의 어느 때는 웅잠함과 어느 때는 눈물겨운 아름다움의 소리가 머리 속을 울리는 상태로 집에 가는 버스 정거장이 있는 종로2가까지 걸어오며 주변의 소음을 잊은 채 감성에 흠뻑 젖어 있곤 했다. 소년은 그런 감성을 지니면서 성장해 나갔다.
이제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제일 그리운 것은 마음을 짜릿하게 느끼게 하는 감동의 능력이다. 때때로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소년 시절의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감동을 느껴보려 마음을 짜보아도 그런 순간들은 다시 돌아 오질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런 순간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라져 가는 감성을 다시 일깨울 수 있을까? 문득 이런 노력이 어쩌면 요즘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바람인 명상이라는 화두와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의 주인이 내가 되어야 하는데 외부의 사건들에 빨려 들어 나를 잃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을 살아가는 인류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고 자신을 타인의 소유로 맡기고 살아 가면서, 그걸 깨닫지 못하기에 힘들어 하고 괴로워한다.
19세기 후반의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위버멘쉬 정신을 찾아야 한다고 외쳤던 것도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이라고 칭해지는 외부의 권위에 나를 빼앗겨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일찍이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난 석가모니가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깨달은 바를 설한 불교라는 종교의 가르침에서 제시한 바가 있다. 소위 금강경에서 얘기하는 인상, 수상, 수자상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종교란, 한자 뜻 그대로 으뜸 가르침이다. 즉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달리 해석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가르침을 말하다. 그래서 religion의 번역으로는 적절치 않다. religion이란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신에게로 돌아가자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religion의 참 뜻도 신에게 나를 빼앗겨 나를 잃고 헤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통하여 진정한 나를 찾자는 방편의 관점으로 보면, 결국 모든 생각은 나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내 정신을 바깥으로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겠다.
내가 내 정신의 주인이 되어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으면, 소음에서 벗어나 나의 신호를 붙들 수 있다면 집 나갔던 나의 감성이 다시 돌아 오지 않을까? 요즘 명상이 선풍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때때로 모든 생각을 중지하고 홀로 산책의 길을 나서는 것도 내 정신의 주인이 되는 연습이지 않을까?
세계적인 피아노 경연대회인 반 크라이번 콩쿠르 2022년 대회에서 우리나라 18세의 어린 소년 임윤찬이 우승을 했다. 4년 마다 열리는 대회의 2017년 우승자 선우예권에 연이은 것이었다. 임윤찬에 대한 찬사가 대단하여 선우예권의 명성을 덮을 정도였다. 어느 날 임윤찬의 대회 연주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실황 연주 녹화 동영상에 중간중간 해설을 자막으로 달아 놓은 것을 보았다.
오랜만에 가슴이 뭉클하며 순간순간 눈물이 글썽이는 나를 발견하며 이게 그렇게 그리워하던 감성이었는데 싶었다. 아쉬운 점은 청춘의 시절에는 머리로 이해함이 없이 바로 가슴으로 느껴서 뭉클하고 쭈삣해지고 정신이 고요해 지는 순간을 맞았었는데, 이제는 전문가의 해설 도움을 받아 머리로 이해하고 동시에 가슴으로 느끼는구나 하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그런 식으로라도 감성이 돌아와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런 순간을 다시 맛보니 바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더 커진다.
가능하면 사회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의 시간을 줄이고 혼자 여유있게 목표하는 바 없이 한가로운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회사에서 사장으로 일할 때 가능하면 세세한 업무는 임직원들에게 위임하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를 노력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외부 상황에 매몰되어 나를 그 속에 가두면 나는 온데 간데 없어진다.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내가 타인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 힘을 쌓아야 한다. 어쩌면 코칭에서 부르는 셀프 코칭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더 나은 나를 그릴 줄 아는 혜안과 그런 나의 모습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나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니체의 위버멘쉬 같은 독립자가 되면 다시 바로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청춘의 시절에는 별 다른 노력 없이도 가지고 있었던 조물주가 그 나이에 준 선물을 이제라도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글을 마치며 내가 두어달쯤 전에 쓴 시를 옮겨 적는다. 이런 것도 시가 맞다면.
(노연상)
싸늘한 공기에
하늘이 더 맑다
기분이 금방 날아 오를
독수리 폼새다.
차라리 뿌연 하늘이 그립다
적어도 정직할 순 있으니
나에게 만이라도.
노마딕이라 했건만
펴진 의자를 그냥 둬야하나
비겁해 지긴 싫고.
또 누가 나의 니체를 듣고 싶어하나
고독을 해소하는 작업인데.
외로워 마라
고독하라
자기 도취에 내뱉으나
고독보다 외로움이 더
가까이 와 있다.
그래도 머리가 시린 싸늘한 공기와
가슴 아린 맑은 하늘이 나의 주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