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 자체로 구별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힘든 직장생활에 부딪히거나 하면 또 이야기한다.
"아이들 때문에 사는 거지"라고 말이다.
여러분은 아이들 때문에 사시나요? 혹시 결혼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사시나요?
혹시, 지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목표’가 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이유라고 들 한다. 목표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가기 힘들고, 목표가 없는 삶은 바다 위에 표류하며 방향을 잃은 배와 같이 그렇게 또 어디론가 정처 없이 흘러간다고들 한다. 그럼 목표를 갖는다면 나의 삶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나도 언젠가 ‘목표’에 집착한 적이 있다. 그 유명하다는 다이어리에 칸칸이 비워져 있는 삶의 목표의 분류들, 버킷 리스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창한 사명까지 말이다. 비워둔 채 버려지고 또다시 목표를 위해 사들이는 수많은 노트들의 압박은 여전히 나의 삶의 무언가를 채우기는 힘들었던 것 같다. 채워야 하는 ‘공란’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나의 ‘목표’를 만들어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 이 간단하지만 심오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답을 난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삶의 이유가 뭔지 깨닫는, 아니 고민하는 순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시작되고 계속되는 과정보다는 삶이 지나간 후, 살아가야 할 시간들의 막바지에 우리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복잡한 사정들, 또 수없이 얽히고설켜있는 타인의 삶들 과의 관계 속에 만들어져 가는 삶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과정 속에서 이미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거창하게 적어가는 ‘목표’의 공란을 채울 수 없을지라도, 매일매일의 삶을 좇아 살아가는 삶에도 목표는 있다. ‘하루 먹고 하루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 조차 삶의 보이지 않는 목표가 그들을 움직이고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있다. 자기계발의 시작을 ‘목표’에서 찾는 많은 서적과 조언들이 난무하는 지금, 세상에서 수없이 속삭이는 그 목표의 공란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어느새 땅에 떨어지고 있는 세상이다. 그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또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업적인 세상의 가치가, 가끔은 하루살이 같은 삶 속에서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또 누군가에게는 사치 일수도, 때론 독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수없이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던 ‘목표’의 공란과, 버킷리스트와 또 무슨 리스트에 빼곡히 적어야 할 것 같은 수많은 목록들이 오늘 하루 내 삶을 채우지 못한 공란으로 만들어 버린다. 삶의 어떤 부분을 정의하고 답을 찾는 것, 어쩌면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인생과, 앞으로 또 다가올 인생의 시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이 저 머나먼 선대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 있는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방향들은 결국 누구도 가보지 못한, 해결되지 못한, 그 길에 대한 소망과 이상이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바람일 뿐, 오늘도 세상 속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지친 오늘의 삶은 그 바람과는 거리가 멀뿐이다.
자신의 삶이 소중하므로 더 큰 목표와 실행을 위해 오늘도 달려가고 있는 강한 ‘나’의 삶도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한없이 연약하고 나약한 ‘나’의 삶도 함께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가치를 그 순간마다 변화되며 만들어져 가는 그 가치의 소중함을 외면해선 안된다. 그 누구도 외면한 내 삶의 소중함을 되돌려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목표’에 포장된 인위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상대적인 가치가 개별 삶의 가치를 비교우위 속에 가둠으로 존중되지 못하는 타인의 삶의 가치를 그 자체로 존중할 수 있는 오늘의 내 삶이 되길 희망해 본다. 삶의 목표를 찾기 위해 적어 내려가야 하는 수많은 목록 속이 아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자신만의 삶이 만들어 갈, 아니 이미 만들어 가고 있을지 모르는 그 삶의 고귀한 가치를 찾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