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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Apr 28. 2019

세 번째 #17

실패들

 확실히, <움직이는 사람들> 공연이 파투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어떤 전환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말해왔듯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이분법의 고수를 전제로 한, 다큐에서 픽션으로의 전환이라거나 일상에서 무대로의 전환 따위의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런 이분법에 의존하고 싶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전환보다는 그것들 서로 간의 은유가 있다고만 해야 할 것이다. 대신에, 전환이라는 단어는 그저 이 영화의 아주 느리고 느슨하며 조용한 내러티브에 대해서만 사용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공연, 무대를 향했었던 배우들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공연 실패를 암시하는 장면 이후에 바로, 노주연 배우가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서 엄마에게 공연이 엎어졌다고 말하는 장면을 배치하고, 그리고 나중에 노주연 배우가 방바닥을 닦으며 엄마에게 하는 독백에서 공연이 엎어졌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배치한 것, 그리고 그보다 먼저, 공연이 파투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장면에서의 컷 구성을 픽션처럼 보이도록 한 것, 그리고 그보다도 더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주석과도 같은 자막 컷에서 해당 공연이 정확히 어떤 기간 동안에 공연이 되었다고 명시했었던 것 모두는, 바로 그러한 내러티브 전환 자체를 이 영화의 사유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그렇게 이중의 내러티브를 이끌게 된 드러나지 않는 배경을 이 영화의 상상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내러티브가 관객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어떤 '극적인 내러티브' 혹은 '극적인 전개' 자체는 애초에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이 엎어지는 장면 다음에 계속 이어질 배우들의 일상 장면들은 한편 정말 공연 실패와 내용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연의 실패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의 일상과 이들의 고민이 계속될 것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전환을 극적이지 않게 하는 것은, 아주 멀리 길고 느리게 빙 둘러서 방향을 돌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만 전개되어 왔었기도 하다. 좀비 역할 오디션 영상을 찍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 이후 좀비 역할 오디션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이어지다가, 그 결과를 나중에 자막으로만 간단하게 말한 것, 어떤 대화 속 발언들을 보여준 뒤, 그것이 연극을 준비하는 회의임을 천천히 간접적으로만 알려준 것 등 말이다. 그런 방법들은 우리가 선택한 장면들의 의미를 바로 결정짓는 대신에 그 의미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업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실패들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실현되지 않은 실패들, 스스로가 생각했던 모습의 배우가 되지 못한 실패뿐만 아니라 배우를 그만두지 못하는 실패들, 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실패들. 그리고 뒤늦게 다소 무리하게 굳이 좀비 연기 장면을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죽는 데 실패한 존재인 좀비가 이러한 내용을 암시하거나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한테 그저 실패는 반복과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흥미롭고 멋지다.

 그래서, 이 영화도 실패하면서 전개되기 때문에 아주 멀리 길고 느리게 빙 둘러서 자신의 궤적을 그린다. 그리고 이 배우들은 돌아온다. 그리고 자꾸만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내가 머물렀던 시공간에서 나를 바라보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뜻이다. 그러는 사이, 영화 속에서 내가 이 배우들로부터 빼앗은 어떤 무대를 그들이 목표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로 그들 각자에게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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