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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y 12. 2019

세 번째 #18

어떤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

 마지막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이 영화가 처음 제안됐을 때부터 우리가 항상 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이 네 명의 배우들이 수행해야 했을 장면-연기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는 일을 매 회의 때 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할까? 우리 영화에서 확실한 사실 중 하나는 이것이 사전에 쓰인 대본에 의한 영화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낼 장면들을 미리 예상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이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또는 각자의 삶에 대해서도 미리 보려고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영화는 즉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즉흥이라는 것이 사전에 전혀 계획되지 않는다는 그 불가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삶을 매번 새롭게 살고자 하기 위한 것임을 뜻할 때 바로 그러하다. 그것은 우리 삶과 시간의 어떤 연속성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어떤 연속성이 도저히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시간이나 우리의 삶이 연속성에 희생된다는 뜻이 아니라,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연속성을 주파하고 지나간다는 뜻도 아니라, 어떤 삶과 시간은 항상 우리에 의해 수행-연기될 뿐이며 그것은 그 자리에서 그 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믿음에 의해서만 다음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사람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이 영화의 편집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왔고, 편집의 과정은 각 장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각 장면들을 어떤 의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한 작업은 배우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해왔던 것을 시나리오 형태로 다시 기록해보기도 하고, 장면화 하지는 못했지만 회의 때 했던 말들을 다시 찾아서 곱씹어보기도 했다.

 일단 나는 <나무>의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서 영화 중간중간에 텍스트 자막 삽입을 통하여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부수적 역할의 자막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의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장면이라기보다는 '어떤 것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기 위한 장면이기도 했다. 하나의 장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자막 텍스트 장면이라는 하나의 형태와 역할이 고정되어서는 안 됐는데, 영화가 마련한 다양한 기회들을 통해서 다행히 다양한 형태와 역할로 그것은 사용될 수 있었다.

 좀비 연기 장면 이후의 배우들의 일상 장면들은 이 배우들이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 자기만의 몸짓과 표정과 말투와 생각과 시간들을 갖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증명에는 논리나 근거 따위가 필요하다기보다는 그저 충분한 시간과 시선이 필요했다. 어떤 장면들에 대해서는 그 장면의 의미가 반드시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것이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존재라는 것에는 반드시 그러한 불명확성과 의문점이 필요하기도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존재에는 어떤 무리하고 부조리한 것처럼 느껴지는 짐이 얹어져야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러한 불명확성을 안고 가는 것은 어떤 결말, 이 영화 전체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위험 부담을 안고서 상상을 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한편, 배우들이 연극 회의 장면에서 하는 개인적인 생각들에 대한 발언들과, 배우들 각자의 일상 장면들이 교차 반복되는 편집을 하면서, 나는 이들이 본인들에 대한 일종의 대본 지문을 스스로들에게 읊은 후 그것을 추상적으로 연기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연결을 해제하는, 그러니까 서로 은유되는 방식으로 평평하게 나열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로 표현되는 것과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의 관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대신에 "'말'은 '관계'다"라고 말하기 위해 말처럼 보이는 것과 말처럼 보이는 것을 나열하면서 그 사이의 관계를, 어떤 침묵이라는 관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을 위한 편집의 과정은, 되새김의 과정은, 재인용의 과정은, 우리가 말한 것들만을 통해서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지 않는 방식을 찾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결코 말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기어코 지켜내는 표현은 가능할까? 그것은 그저 우리의 불능을 불능에만 그치도록 놔두는 꼴일 뿐일까? 그렇게 체념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나는 우리가 그 주제의 근방을, 그 침묵의 배경을 거닐고 있어 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다시 또다시' 의미를 생각하기 '(재)시작'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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