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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y 17. 2019

세 번째 #19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볼 수 있다는 것

 각 배우의 마지막 장면을 구상하는 것은 이전의 모든 장면들이 사실은 그러했던 것처럼 배우가 그 자신에게 지문과 대사를 부여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 자체는 그러한 사실을 그 자신들이 조금 더 인식하는 무대였다. 자신만의 일상적 시공간에서 공연된 그 무대들은 보이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배우 자신이 직접 보기 위한 무대였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둘을 같이 사유하고자 했던 것은 보다/보이다의 이분법 및 양자택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제작 초기부터, '왜 이 네 명의 배우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왜 이 네 명의 일상을 관객들은 들여다봐야 하는가?' '이 네 명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어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떤 특별성 혹은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전제 하에 있는 질문이었다. 대신에 나한테 그 질문들은 실존주의적 의미로 바뀌어왔다. '왜 이 네 명의 배우들은 존재하는가?' '왜 이 네 명의 배우들은 존재하려 하는가?' '이 네 명의 배우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혹은, '이 네 명의 배우들은 어떻게 충분히 존재하지 못하는가?'

 어쨌든 내가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의 존재의 한계 또한 구성적이라는 것이다. 혹은 우리의 한계야말로 구성적이다. 또, 무대는 배우가 보이는 곳인 것보다 훨씬 배우가 보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은 배우는 생각보다 훨씬 관객이다. 또, 삶이라는 현실은 정말로 연기perform되는데, 그 퍼포먼스에 실패와 포기와 불확신과 불확실을 포함하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혹은 시간은 양자택일 따위의 선택에 의해 생성되거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고민과 망설임에 의해 반복된다.

 나는 영화 속 자막-컷에서, 다큐멘터리 연극에 대해 소개한 후, 다큐멘터리라는 것에 대한 내 나름의 설명을 위해 '인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영화 제작 중반쯤, 내가 다큐멘터리 연극에 대해서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가 무언가를 인용함으로써 직접 보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그런 해석을 영화에 재인용한 셈이다. 그것은 '인용'에게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게 또한, 그 자신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게 하기 위한 인용이었다.

 영화 제작 아주 초반에는, "이러한 영화는 영화란 무엇인가, 현실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살아간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연기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즉 배우로서 살려고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여자로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밖의 가능한 질문들, 실패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포기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내가 나를 짓누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을 ... 모두 동일한 거리에 있도록 위치하여 바라본다는 것, 그것들을 동일한 깊이에서 명상해내기 위한 영화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들 모두를 동일한 거리에 있도록 위치하여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것들 서로가 서로를 다양한 의미에 열리도록 은유하도록 한다는 것인 것 같다. 이러한 주제는 비단 이 영화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영화의 근본적인 주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을 더욱 다양하게 늘리는 것이 나의 지속적인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은, 지금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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