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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y 09. 2023

사랑의 고고학 / 이완민

Archaeology of love / Lee Wan-min / 2022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흐릿한 기억이나 착각으로 인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들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고고학이 갖는 의미는 일단 주인공 영실의 직업적 외관을 특징짓는 측면이 있겠고, 이 영화 자체가 수행하는 영실의 마음속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은유적인 의미로서의 고고학적 발굴과 해석의 측면이 있을 것이다. 후자는 영화의 제목이 갖는 정직함처럼 잘 깔린 레일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는 그 레일을 타고 영실의 마음속 풍경을 감상하면 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에 브레이크를 걸고 잠시 멈춰 서고 싶은 구역들이 있으니, 그건 영실이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역사에 대해 갖는 태도로서의 마음, 혹은 영실의 어떤 주도적인 마음가짐의 어떤 미세한 힘이 발견되는 지점들이다. 영실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는 현장 작업에서, 작은 발굴용 삽으로 땅을 살살 긁어내는 스냅을 할 때의 손목 힘줄의 힘이라고 할까나. 흙 색깔이 달라지는 지점이 나오면 거기에는 마치 어떤 시간의 끈 같은 것이 있는 듯이, 어쩌면 시간은 물론 기억과 꿈조차 초월하여 아주 실낱같이 이어지는 다소 의아한 맥락들을 붙잡고 그것을 긍정하고 믿는 의미로서의 고고학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을 조용히 갖게 하는 그 스냅의 힘줄.


 일단 간추려보자면, 영화는 영실이 자신의 마음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에 대한 영실의 진실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거기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인지를 발굴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것들을 추리하거나 심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마치 영실이 싫어하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연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답답하고 엉뚱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영실의 스냅의 힘과 속도에 조금 더 이입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영실은 왜 자꾸만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지... "스톱"을 잘 못하는 영실은 왜 그런 사람인 것인지...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그런 영실을 우리는 답답하게 여겨야 하는 것인지... 중얼거림에 더 어울릴 만한 생각들과 질문들을 파보고 싶다는 것이다.


 첫 씬의 학교에서 영실에게 도움이 필요 없냐고 묻는 학생을 기억해 본다. 어느 정도의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 학생은 말주변 없는 영실의 수업을 꽤나 집중해서 잘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학생은 영실처럼 고고학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수업이 끝난 후, 영실은 그 학생의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거절하지 않고, 그다지 크게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 가방 들어주기를 부탁한다. 영실이 그 학생의 따돌림 피해를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아마도 모르고 있다고 봐야 맞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여부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데, 바로 그렇게 그걸 중요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영실의 마음이겠다. 모르고 건네는 마음.


 훌쩍 건너뛰어서 후반부에 영실이 다른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과 연결시켜 본다. 첫 장면의 학교에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학생들과 같은 높이에 앉아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질문들을 받는 그 장면은 마치 간담회나 인터뷰처럼 보이기도 하다. 여기에서의 영실의 표정과 분위기는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초반 학교 장면에서 영실은 고고학을 자신의 두 손 사이 공간에서 개념적으로 설명했지만, 후반 학교 장면에서 영실의 두 눈 속 너머에는 마치 고고학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이고 학생들의 질문 앞에서 영실은 자신만의 고고학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것 같다. 현장에서의 고고학 독립 연구자로서 동료들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느냐에 대한 질문을 받은 영실은,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답한다. 나에게는 영실의 그 답변이 가리키는 것이 첫 씬 학교에서의 가방을 들어준 그 학생인 것만 같다. 후반부의 영실은 그 학생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혹은 훗날 그 학생과의 동료로서의 만남을 예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영실이 마치 뭔가를 말할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 대답은 사실 첫 씬 학교에서 하고 싶었지만 그저 뒤늦게 할 수 있게 된 말일 수도 있겠다. 후자가 영실의 마음에 조금 더 어울리는 예상이겠다. 타이밍을 좀 놓치는 마음.


 영실의 두 번의 '8시간'은 어쩌면 그런 의미일 수도 있겠다. 무슨 말이냐면, 인생과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라면, 8년 전의 8시간은 결과적으로는 그리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고, 8년 후의 8시간은 현재적으로는 썩 괜찮은 타이밍이었을 뿐일 수도, 그러니까 반복되는 두 '8시간'에서의 두 남자의 차이에 대한 아쉬움은,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된 일일 뿐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의 8시간에서의 공통점은, 그 두 번 모두 영실이 먼저 상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는 것이다. 8년 전에는 인식이 먼저 영실에게 대시했으니 영실이 좋아한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게 된 것이고, 8년 후의 우도는 영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도도 영실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것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기에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영실이 끝끝내 우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으니 마찬가지로 좋아한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게 된 것이다. 연인으로서의 인연이 착착 맺어지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타이밍은 8년 전이 더 잘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영실에게 그런 그럴싸한 타이밍은 오히려 영실로 하여금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게 만드는, 혹은 기다리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어떤 마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박탈할 뿐인 애초에 나쁜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식과는 다르게 8년 후의 8시간을 같이 보내는 우도는 그의 영실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영실이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자신의 마음에 기대하는 무엇일 것이다. 어쩌면 실수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저 기다리는 마음, 어쩌면 유예하는 마음.


 한편 영실의 제일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가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들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유지되는 가족에 대한 영실의 원칙 같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영실의 성격을 형성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영실의 본가를 기억해 본다.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는 집구조와 풍경,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임이 틀림없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공기. 그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살을 고민하고 실행 직전까지 갔었음을, 그로 인해 현재 부부의 관계가 거의 마비된 상태임을 영실에게 사실상 고발한다. 자신을 향한 인식의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들에 쉽사리 "스톱"을 외치고 단호히 그를 뿌리치지 못하던 영실이, 부모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말을 한다. 그 말의 내용은 어쩌면 인식과 계속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자신을 방어하는 논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부모님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화해시키며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역할이다.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부모님의 모습들에서 확실히 그 역할이 제대로 완수됐음이 증명된다. 잘 때 방에 들어오지 말라던 딸의 경고성 부탁에도 불쑥 들어와 뜬금없이 장어탕을 건네는 어머니에게, 영실은 짜증이 났지만 그럼에도 장어탕을 들이켠 후 여전히 차분한 톤으로 다시 한번 밤에 잘 때는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뿐이고, 그렇게 방을 나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에 잘 자라는 인사 또한 잊지 않고 건넨다. 어머니의 등에 전달된 그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의 불안한 마음을 따뜻하게 달랬으리라. 하지만 영실의 표정 중 가장 사나운 표정이 드러나는 장면 또한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이다. 자신의 사무실을 부모님께 처음 보여주는 중에 모르는 남자로부터 다소 무례한 말을 듣고서, 영실은 부모님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결과였을까? 하지만 영실의 "저 새끼는 다른 날 제가 처단할게요"라는 대사를 보면, 왠지 그것은 어떤 생존 본능 혹은 보호 본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실은 부모님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호하고 안심시키려는 데에 여념이 없는 것만 같다. 살리려는 마음.


 하지만 영화 말미에 느껴지는 영실의 어떤 변화를 상기해 본다면 저러한 단단한 마음에도 나중에는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랬든 저랬든, 이랬을 수도 저랬을 수도, 이랬을지라도 저랬을지라도... 라고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그 부담을 좀 내려놓을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영화는 그러한 가능성들을 착각이라는 것을 통해 열어두려고 하는 것만 같다. '살리려는' 마음의 반대급부라고 봐도 될 '장례'식장 장면을 기억해 본다. 자신과 취향이 비슷했던 온라인 중고책 판매자의 장례식인 줄 착각하고 갔던 곳은 이미 2년 전 죽은 상태인 실제 그 온라인 아이디 소유자의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즉 그 아이디 계정의 주인은 장례의 당사자가 아니지만, 그 계정 주인의 아버지가 딸의 아이디를 가지고 중고책을 팔아왔기에 실제로 영실에게 책을 판매한 사람의 장례식인 것은 맞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복잡한 사연보다는 아버지-딸이라는 대구이다. 만약 영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 회복을 위해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영실은 이 영화에서 장례식을 두 번 갔을 수도, 한 번은 자신이 상주였을 수도 있었다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또는 반대로 영실이 어떤 일로든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면, 온라인 중고책 판매자처럼 영실의 아버지가 영실의 책을 판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가능해진다. 그런 상상들 위에서, 중고책 판매자의 부고를 보고 장례식을 가는 영실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마냥 절절하기만 하거나 따뜻하기만 한 마음은 아닌 것 같다. 영실은 그 장례식을 갈 때 버스를 착각하고 잘못 탔었다. 그런 어설픔과 착각은 어쩌면 경직되고 긴장될 수도 있는 마음을 풀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영실이 보통은 가지 않아도 됐을 것으로 보이는 장례식에 어찌 됐든 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령 영실의 부모님에 대한 마음에 추후 어떤 변화가 있을지라도 남아 있을 어떤 것이다. 영실이 인식의 집에 사 온 화분에 대해 인식이 어차피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할 때에도 묵묵히 화분을 챙기던 영실은 어쩌면 죽음에 의연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영실이 우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으로 생각되는, 버려지거나 낭비되는 나무가 없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우도처럼, 자신이 보살필 수 있는 존재들을 그저 보살피는 데에 있어 조금 허술할 정도로 계산적이지 않은 마음.


 인식의 앞에서 영실에 대해, 그리고 영실 앞에서 인식에 대해, 불필요하고 무례할 수 있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던 효원에 대한 영실의 마음도 흥미롭다. 효원은 영실의 꿈에서, 영실의 그야말로 꿈인 잡지 만드는 모임에 초대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표정은 자신이 이제껏 영실에게 보인 무례함들을 기억하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한 사람을 자신의 (이중적 의미로서의) 꿈에 초대하는 것 또한 영실의 마음이다. 사람을 꿈으로 품는 마음.


 영화는 이처럼 아주 조용하고 미약하고 어설프지만 왠지 모르게 단단한 영실의 마음들로 짜여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재밌는 것은 영실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보이는 동료 수연이, 영실이 인식을 처음 소개해줬을 때부터 인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수연도 어쩌면 영실처럼 자신의 말을 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었던 것인데, 영실이 그에 대해 그걸 왜 그때 바로 말하지 않았냐고 묻자, 인식에 대한 그 당시 영실의 마음 때문이었다고 수연이 대답하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진실된 마음만이 발굴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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