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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Feb 18. 2024

다섯 번째 #5

"불안전한 시선"

 '불완전한'도 아니고, '불안한'도 아닌, '불안전한' 시선이란 무엇일까? 그 단어 선택이 의도적이었든 실수였든, 어쨌든 그 자신에 따르면 배우 유림은 그러한 시선을 이 영화 안에서 가졌다. 그것이 배우가 이 영화 안에서 가진 시선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니 그 불분명한 형용사의 의미를 쫓기보다는, 그 텍스트를 그저 받아서 영화와 배우의 시선에 대해서 골똘해보자. 배우란 영화 속에서 시선을 갖는 사람이다. 프레임 안에서, 배우는 관객들은 절대 보지 못할 프레임 밖을 향해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배우는 프레임 안의 보이지 않는 것에도 또한 시선을 던진다.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볼 수 없다. 배우는 그것들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못한다. 배우는 말하려는 대신, 보려고 한다. 어쩌면 그저 자신이 보려고 애쓰는 중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여력이 없다. 배우는 자신이 보려는 것 혹은 자신이 본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을 쉽사리 믿지는 못한다. 대신 자기 자신을 포함한 관객에게 묻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영화 내내 배우의 머릿속에 맴돈다. 아니, 배우와 영화가 이 질문을 내내 맴도느라 사실상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배우의 시선이 프레임 안에 닿아 있든 프레임 밖에 닿아 있든, 배우는 어쨌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만을 본다. 혹은 우리는 배우가 정확히 무엇을 보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몽타주를 통해 그것을 추측하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몽타주는 배우의 시선과 생각을 감히 확신하려는 무모한 짓이 될 수도 있다. 관객은 몽타주에 속을 수도 속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관객의 선택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몽타주 없이 관객은 배우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카메라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이지만 누구의 것인지 우리가 언제나 확신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배우가 언제나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정확히 무얼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언제나 확신할 수는 없는 것처럼, 몽타주는 언제나 어떤 말을 하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어떤 그림인지 어떤 관계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확신하려는 것만큼 확신하지 않는 것 또한 관객의 선택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며, 그 배우는 확신하지 않는 연기를 한다. 그는 설득하려는 몽타주의 일원이 아니라 확신하지 않으려는 관객의 일원이고자 하는 배우일까?


 어쩌면 그러한 배우가 하는 것을 연기 혹은 공연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는 픽션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 같다가, 그저 벽을 따라 걷는 것과도 같다. 혹은 벽에 자신의 시선을 숨긴다. 뒷모습만 보인다. 벽을 따라간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감춘다. 관객이고자 하는 배우에게도 관객은 있을까? 그러한 것이 배우의 안전하지 않은 시선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안전함은 배우의 몫일까 관객의 몫일까? 혹은 같이 짊어지자는 다소 무례하거나 무책임한 권유일까? 그의 시선은 관객의 맞은편에서 관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옆에서 관객과 같은 방향을 취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그는 관객의 맞은편에서 관객과 똑같이 어둠 아래 앉아 관객처럼 관객을 바라보는가? 그러한 시선은 자신이 프레임 안의 어떤 특별한 인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가? 그렇다면 유림의 불안전한 시선은 유림이 픽션을 위태하게 만들기 위한 종류의 시선이었을까 아니면 위태한 픽션 안에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선이었을까?


 극단 단원들끼리 공연 후 뒤풀이를 하는 장면을 리딩하는 장면과 소영의 두 엄마가 대화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장면에서, 일인다역으로서 복제되었다기보다는 분열되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배우의 각 컷에서의 시선들은 프레임 바깥의 자신(들)을 향해 서로 교차하지만 각 프레임 속 배경들은 그들이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비동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을 포함하여,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의 닮음을 무시할 수 없는 관객은 한 명의 배우가 프레임 바깥의 자신을 바라보며 대화한다는 그러한 장면에 속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는 표현은 그것이 선택 가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기에, 관객은 거기서 속는 대신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러니까, 이 불가능한 컷들을 관객은 자신의 머릿속 스크린 안에서 기어코 몽타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유영이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과 소영의 두 엄마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을 연기하는 장면에서, 배우는 동일한 앵글의, 하지만 동일한 컷은 결코 아닌 (두) 컷 안에서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한 인물이 보일 때 다른 한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배우의 두 모습이 동시에 보이지 않고 각자의 대사를 할 때만 번갈아 보인다. 이번에는 프레임 안에서 시선이 교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들은 결코 마주 보지 못하고 부정확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이 하나의 컷이 아니라 두 개의 컷에 의한 몽타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몽타주에는 단순히 "두 사람이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이 춤을 춘다"는 의미를 제치는 다른 의미가 더 가능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결코 마주 보지 못한다"거나, "이 두 사람은 결코 함께 춤을 추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이 영화에 대한 메타적 인지로 물러나서, "실패한 시나리오와 한 명의 배우로 구성된 이 영화는 결코 관객을 속일 생각이 없을 것이겠구나"라거나. "이 영화는 그저 실패하는 영화인가?"라거나. 어찌 됐든 관객은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실패하는 영화는, 실패하는 시선은 정동과 의미의 일으킴을 실패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일으킴의 실패에 대한 정동과 의미를 일으키는가?


 유영을 찾으러 호수에 간 유영의 엄마가 소영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이르자, 대사와 동선, 장소 등 통제가 어려운 요소들이 늘어나면서 영화는 더 이상 이전의 혼란스러울지언정 픽션과 조금이나마 닮기는 했던 몽타주조차 하지 못하고, 배우는 이제 ng컷, 연습 장면, 그리고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의 실패의 장면들 속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의 장면들은 그 자신들끼리, 그리고 그 앞의 장면들 혹은 뒤의 장면들과 몽타주 되지 못하는가? 이러한 장면들을 보는 관객은 영화 속 실패한 시나리오의 내용을 보는가 아니면 그 내용을 다루는 데조차 실패하는 영화를 보는가? 아니면 이러한 영화를 보는 자신을 보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 배우는 무엇을 보는가? 현실의 무너짐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픽션의 무너짐은 무너지면서 컷과 컷 사이 즉 몽타주의 가능성에 그저 함몰되는가? 그리고 그 작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의미를 간직할 수 있는가? 그 와중에 배우는 자신이 이다음엔 무얼 봐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컷들은 과연 그 물음에 대한 답인 것일까?


 더 이상 배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배우가 본 것들, 배우가 쓴 것들만 보인다. 배우가 시나리오 속 인물의 이름으로 만든 인스타그램 계정에 그 가상의 인물이 찍었을 법한 사진들과 썼을 법한 글들을 어설프게나마 업로드하는 것 또한 연기라고 할 수 있을까? 진행 중인 연기가 아니라 완료된 연기? 거기에서 우리는 배우의 시선을, 배우가 무얼 어떻게 보는지를, 그리고 그 한계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가상의 인물의 시선과 행위와 말의 흔적과 한계를 볼 수 있을 뿐일까? 배우가 구성하고자 하는 실패한 시나리오 속 가상의 인물이 본 것들과 이 실패한 시나리오와 그리고 실패하는 영화와의 관계의 의미는 어떻게 몽타주 될 수 있을까? 또는, 꼭 몽타주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 내내 간헐적으로 등장했던, 배우가 시나리오북 여백에 써온 글들은 영화 속 몽타주들을 침범하고 방해하고 끊어내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들과 함께 몽타주 되기 위한 것이었을까? 혹은 명확한 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 모든 회귀적인 질문들은 우리에게 몽타주를 포기하게 하기 위함이거나 몽타주를 실패하게 하기 위함인 것일까?


 배우는 시나리오 속 가상의 인물의 사진 속 공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가 원하지 않듯 우리가 속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상의 인물의 시선이 아니라 배우의 것이다. 자신의 시선 안에서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고자 했던 시나리오 속 두 인물의 만남을 주선한다. 사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배우라기보다는 배우의 시선을 몽타주 하는 영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초반의 리딩 장면 등과 같은 배우 혼자서의 주고받기의 연기들과 동일한 의도로 지금 이 장면이 연기된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의 실패의 장면들을 지나온 배우가 그저 두 인물 각자의 행위를 어떤 연기적 측면의 주고받음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수행한 것뿐이다. 그리고 배우의 앞선 고군분투의 그 혼자만의 연기를 영화가 닮아 다시 연기하는 수순에 가깝다. 그렇게 영화 내내 계속되어 왔던 공존하지 않는 다른 시간 속의 교차 불가능한 시선들이 그 불가능함에 다시 도전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깰 수는 없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것은 성취를 목표 삼는 것이 아닌 실패를 목표 삼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왜 이 영화와 이 배우는 그렇게 실패를 재차 시도하는가? 영화는 자신이 속이지 않을 거라고 사실상 선언한 종류의 몽타주,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두 인물의 시선의 마주침을, 역시나 속이고자 하는 의도 없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다가 배우를 잃어버린다. 혹은 날려버린다. 배우의 시선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 이러한 영화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프레임 안의 보이지 않는 배우의 시선을, 대사를, 표정을, 우리는 정말로 사라졌을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은 "사라진" 시선이 아니라 "정말 사라졌을까?"의 시선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말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지에 대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상상할 공간을 기어코 위태롭게 주고자 하는 시선. 어떤 종류의 시선은 언제나 불안전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시선이라고, '불안전한'과 '시선'을, 그리고 그 텍스트-이미지와 이 실패의 영화를 몽타주 할 수 있을까? 혹은 결코 할 수 없으리라고 말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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