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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y 12. 2024

다섯 번째 #6

"이 시나리오를 벗어날 수 없다"

 최근 유림은 나에게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자신은 못하겠다고, 자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꽤나 진심으로 하는 말로 보이긴 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이후에 정말로 계속 그 말대로 연기를 안 하겠다는 삶을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자신의 말을 지문으로 삼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지문을 잊어버렸거나 무시하기로 했는지, 혹은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장면 이후에 자연스럽게 몽타주될 만한 삶을 살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서사 진행과 연결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에 대한 믿음을 재고하게 만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나는 갑자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점의 유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애당초, 영화 속 유림과 지금의 유림을 몽타주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 둘을 관계 짓는 것은 정당할까? 하지만 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몽타주는 앞의 컷과 뒤의 컷의 정체성이나 당위성에 기초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앞의 컷과 뒤의 컷을 어떤 이유로든, 심지어 이유 없음의 이유로라도 관계 짓는 행위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인물을 따로 연기한 유림을 몽타주하고, 연기하는 유림과 연기 전, 후의 유림을 몽타주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유림이 시나리오 여백에 쓴 노트 등 그 밖의 모든 컷들로 몽타주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몽타주들이 과연 정확히 어떤 단일한 의미인지 알 수 있나?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의미는 그렇게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몽타주는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게 시간을 줄 뿐이다. 그리고 의미라는 것은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떤 단일한 의미를 명시하는 역할을 몽타주에게 부여하려고 할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몽타주가 어떤 것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대신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 한계가 없는 시간 속에서 뭔가가 느껴지거나 움켜쥐는 여러 의미들이 조용히 있을 뿐이다. 결국 떠드는 건 우리의 머릿속이다. 몽타주는 의미를 상상할 수는 있어도 정작 자신이 직접 실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많은 의미가 가능해 보이는 몽타주를 상상할 뿐이고, 어떤 단일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생산했는지는 관심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컷을 최대한 계속 이어가기 위해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품을 수 있을 만한 다음 컷을 고민할 뿐이다. 그래서 몽타주는 애초에 (완수) 가능한 것이 아니고 다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몽타주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해내야 되는 것이거나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불가피하다는 뜻에서이다. 정당한 몽타주는 없고 그저 우리는 몽타주의 계속을 피할 길이 없는 것뿐이다. 명확한 의미화에 실패하더라도, 더 나은 다음 장면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그로 인해 길을 잃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연기도 그렇다고, 시간을 살아내는 것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평면적인 연기가 계속되고, 실패하는 테이크만 반복되고, 시간은 지연되고, 서사는 진행되거나 구축되지 않고. 어쨌거나 그것들은 계속된다. 그것들을 그만하겠다고 하는 것조차 그것은 그다음 장면일 뿐이다.


 무덤덤함이 이어진다. 영화는 배우의 완성된 연기, OK컷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배우의 시나리오 여백에는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배우는 연기에 자신이 없다. 개별 연기가 아니라 연기하는 삶에 말이다. 그가 연기하는 픽션의 내용은 바로 그만큼 평면적이고 모호하다. 이야기가 진행되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야기 자체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사의 내용과 보이는 장면의 실제 날씨는 일치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는 느낌이 아니라 그저 여기저기 고여 있는 느낌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있는지나 모르겠다. 배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을"지 묻는다. 그것은 바로 그가 생각하는 연기의 과제이다. 그러더니 배우는 자신의 연기를 "가증스러운" "향연"이라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연기에 대한 냉철한 평가이자 결론이었을까? 이어지는 노트들에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죽은 딸에 대한 엄마들을 연기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라고 묻더니, 그 부정 섞인 질문은 이후에 "차분하다"는 자신의 워딩에 대한 스스로의 회의를 통해 자기 자신의 연기에 대한 결론 그 자체에의 불확신으로 한 발 물러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방식으로 연기에 대한 평온함이 찾아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우는 자신이 정말로 연기를 해왔던 것인지를 의심하며, "이 시나리오를 벗어"나고자 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가 말하는 '시나리오'는 단순히 형식이 썼지만 실패한 것으로 규정한 후 유림에게 건네진 시나리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림 그 자신이 써온 텍스트들, 자신이 해온 완성될 수 없는 연기들, 인물들의 이야기와 그 한계들, 즉 자기 앞에 주어진 것, 자신이 해온 것,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들의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과 그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무의미함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후에도 장면들은 계속된다.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 유림을 위해서라도 유림의 행위들을 연기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연기라고 부르든 말든 상관이 없어졌다고 봐도 되겠다. 어쨌든 유림이 수행한 것들이 다음 장면에 이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달리 어쩔 것인가? 영화는 어디에서든 뚝 끊어질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실패가 필요하다. 조금 더 이해하기 어려운 실패가 필요하다. 조금 더 알 수 없는 실패가 필요하다. 영화가 끝날 때, 이 실패에 대한 생각이 시작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실패의 끝이 유보되고 지연되는 이유다. 몽타주가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며 자신의 끝을 유보하고 지연시키는 이유다. 지금의 유림의 연기하는 삶에 대한 실패 또한 그러리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어쨌거나 연기하는 삶으로 시작된 시나리오의 끝을 유림은 아직은 유보하고 지연시키고 있다. 명확하고 단일한 의미를 완수하는 몽타주가 불가능한 것처럼, 삶도 여러 가능성을 내포할 다음 행위를 수행하게 될 뿐, 다가올 보이지 않는 그런 순간에 대한 믿음을 간신히 이어나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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