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카이로
카이로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왔을 때, 눈 앞에 선 공항 버스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당장 폐차장으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버스가 시내 가는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섰다. 버스가 도심지로 들어갈수록 기대보단 벗어나고 싶단 욕구가 점점 더 커졌다. 길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족히 8차선은 되어 보이는 도로에 차와 사람이 한 데 엉켜 있었다. 자동차가 연신 경적을 울려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 빨리 다합으로 떠나고 싶었다. 피라미드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카이로를 떠났다.
두 번째 카이로는 견딜 만했다. 스치듯 지나간 첫 카이로지만 한번의 경험이 예방주사가 됐다. 덕분에 못 보고 갈 뻔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었다. 다합에서 다이빙 선생님들과 타보며 익숙해진 마이크로 버스로 기자 피라미드 지구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라 사람이 바글바글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한산했다. 테러의 영향이 확실히 있긴 한 모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호객 행위가 시작됐다. 낙타를 타라, 물을 사라, 모자는 필요 없냐... 쉴틈 없이 말들이 쏟아졌다. 스핑크스를 마주하고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는 스핑크스와 뽀뽀하는 모습을 찍어주겠다며 내게 카메라를 달라고 손짓했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대고 입술을 내밀자 그의 OK 사인이 떨어졌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한발 물러서자 다른 관광객들에게도 내게 그랬듯 포토그래퍼를 자청했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바라보면 뭔가 신비한 기운이 느껴질 것 같았는데 무덤덤했다. 그간 다큐멘터리나 영화 속의 피라미드는 신비의 공간이었지만 실제 마주하니 뭐랄까, 피라미드 모형을 만들어놓은 테마파크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앞에 보고 있는 게 뭔지 잘 모르겠는 느낌. 그러던 찰나 또 누군가 말을 걸며 내게 포즈를 시켰다. 순순히 카메라를 내어주었다 돌려 받는 순간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리고 여긴 이집트니까! (첫번째 사람은 왜 사진을 그냥 찍어줬는지 미스테리다)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사막을 걷는 신기함도 잠시, 타들어갈 것 같은 햇볕에 굴복해 낙타에 올랐다. 입구부터 수많은 낙타 호객꾼들을 뿌치리며 30여 분을 걸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솔직히 주위에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마단 기간이라 물을 못 마시는 낙타 주인 아저씨는 더위를 식히기 위해 연신 손에 물을 끼얹었다. 낙타 위에서 편히 앉아 가는 게 미안했지만, 그제야 너무 더워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보였다. 물론 멀찍이서 바라보는 피라미드는 여전히 미니어처 모형 같았다.
노련해졌다고생각했는데...
노련해졌다고 생각했다. 모로코, 터키를 거치며 웬만한 호객 행위에는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집트 박물관에 가는 그 짧은 길에 두 번이나 속절 없이 당했다.
숙소에서 나와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곳에선 다른 이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 걸 미안해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상하게 박물관에 가는 길이냐는 그의 말에 답을 하게 됐다. 아차 싶어 얼버무리고 가려는데 "아니야. 난 영어 선생님인데, 지금 아내를 기다리고 있어"라며 말을 이어갔다. 신호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제 갈길을 갔을텐데... 그는 "이집트 와보니 어때? 테러와 혁명 이후로 관광객이 줄었는데, 널 보니 반갑다"며 날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결정타. "근데 지금 박물관엔 못 들어가. 저기 보이지? (그는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관광버스를 가리켰다) 지금은 단체 관광객만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야." 블로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정보였지만, 그 순간엔 이집트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내게 그는 "갈 데 없으면 저기 가볼래? 길에서 파는 건 다 가짜야. 저기에선 진짜 파피루스를 팔아. 그리고 지금 라마단 기간이라 특별 세일까지 해"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라마단이라 카페가 열었을 리 없었다. 갈 곳이 없던 차에 잘됐다 싶어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그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순순히 걸어갔다. 도착해보니 그냥 길에서 많이 본 기념품 가게였다. 금전적 손해를 보진 않았지만 그때의 황당함이란...
호객 행위에 당해놓고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박물관 입장이 안 되는 시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목적지를 잃고 발길 닿는 대로 걷던 중에 누군가 또 말을 걸어왔다. 마치 아는 사이인 양 "어딜 가느냐" 묻기에 "박물관에 가려 했는데 단체 관람 시간이라 못갔다"고 답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건 없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했다. '당.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와 함께 박물관으로 걸어가며 이런 저런 얘길 나눴다. 어딜 갔다 왔느냐, 어딜 갈 예정이냐 등등. 나는 "당신을 만나 정말 다행"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길을 건너 박물관 근처에 도착하자 그는 내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가이드 필요하면 연락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이집트는 처음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대영박물관에서 봤던 유물들의 고향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대영박물관전을 할 때도, 영국 여행 중 대영박물관에서도 봤으니까.. 세련된 박물관보다는 유물 보관 창고 느낌이 났지만, 오래전 읽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 <람세스>를 떠올리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라마단의 저녁 풍경
라마단 동안 이곳 사람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은 물론 물도 마시지 않는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한다는 얘길 들었다. 가게가 문을 열지 않는다곤 하지만,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나와 사람들 보지 않는 곳에서 물을 마시고 점심 한 끼 먹지 않는 것쯤이야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더운 날씨에 여행한다고 구석구석 돌아다닌 탓인지 금새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파왔다. 나 역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게 됐다.
해질 무렵이 되면 거리에 활기가 돌았다. 시장엔 저녁 거리를 사러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음식을 손에 든 이들은 조금이라도 늦을까 인파를 해치며 빠르게 움직였다. 길거리 가게 테이블엔 바로 먹을 수 있게 모든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주위에 둘러 앉은 사람들은 숟가락만 들지 않았을 뿐 이미 눈으로 식사를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음식점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주문할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 '땡'을 외치듯, 거리에 사이렌이 울리고 방송이 나오면 사람들은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해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