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늘 바다가 그립다고 했다. 누군가 바다란 단어를 꺼내면 모두들 한마음이 돼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변에서 폭죽놀이를 했던 기억,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공놀이를 할 때 있었던 일 등. 실타래처럼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면 어느새 그들은 익숙한 말로 대화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어를 할 줄 모르는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표정과 리액션만으로 그들이 얼마나 들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브라질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가장 먼저 추천한 것도 바다였다. 더블린의 바다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자부심에 찬 표정이었다. 그리고 6월에 간다고 하니 바다에 들어가긴 춥겠다며 아쉬워했다. 이쯤되니 그 바다가 정말 궁금해졌다.
숙소는 이파네마 해변 근처에 잡았다. 이유는 바다를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 반, 치안에 대한 걱정 반이었다. 이 지역이 리우에서 안전한 축에 속한다고 들었다. 브라질에 도착하기 전 불안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데, 팔할은 브라질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늘 "참 좋은데 좀 위험해"라고 말했다. 길을 다닐 때 휴대전화를 손에 들지 않는 것은 물론, 뒷주머니에도 절대 넣지 않는다고 했다. 숙소에서 만난 브라질 친구 역시 "고향에 와서 좋은데 걸을 때마다 뒤를 확인해야 해서 불편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독일에 살며 고향인 이곳에 잠시 놀러왔다고 했다.
처음 숙소를 나설 땐 휴대전화를 숙소에 두고 나왔다. 책 한권만 손에 들고, 쪼리를 끌며 해변을 걸었다. 숙소로 돌아갈 길을 헤맬까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도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앞서 남미 여행을 다녀온 친구 역시 해변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날치기를 당했다고 했다. 여행 카페엔 가방 대신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다는 글도 봤다.
바닷가로 내려오니 눈이 시원해졌다. 하늘을 새파랗고, 바다와 모래사장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불안감에 움츠러든 어깨가 민망할 정도로 햇살이 따뜻하고, 발가락 사이로 스미는 모래도 따끈해 불안이 조금씩 녹아들었다. 자리를 깔고 누워 태양을 즐기는 사람들, (들어가긴 추운 것 같은데도) 물에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상비약처럼 들고 나온 책을 펴들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글자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지면 파도를 놀잇감 삼아 바다에 발을 담갔다.
이튿날부턴 스마트폰에 카메라까지 들고 나왔다. 한번 경험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전날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채우리라, 조심하면서도 과감하게 카메라를 수시로 꺼냈다.
리우를 떠나기 전, 마지막 해변 산책에 나섰다. 조깅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과수까지 26시간 버스여행의 결의를 다졌다. 전날 시티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파트너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받지 못했던 시티카드까지 쉽게 받았다. 괜히 앞으로의 여행이 순탄할 것 같고, 리우가 한층 더 마음에 드는 순간. 신이 나서 바다로 달려가 카드 인증샷을 찍으며 브라질 바다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름다웠다. 친구들이 자랑할 만큼 멋진 곳이었다. 친구들이 안고 있는 그리움까진 느낄 수 없었지만, 분명 내게도 오래 기억이 남을 만한 바다였다. 리우 바다는 브라질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씻어줬다. 덕분에 남미 여행을 잘해나갈 수 있으리란 자심감을 얻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건사고가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거기에 더해 매일 아침 숙소를 나섰을 때의 풍경 자체가 너무나 따뜻했다.
언젠가는 친구들이 늘 자랑하던 크리스마스 즈음의 여름 내음 가득한 리우 바다도 만날 수 있기를.
+) 리우의 상징과도 같은 예수상을 보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지나치면 아쉬울 것 같아 올라간 곳이었는데, 가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동상이 아니라 내려다보이는 바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