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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Mar 24. 2019

진짜이면서 가짜인, 근데 진짜인 아부심벨

카이로를 떠날 땐 고민 없이 택시에 올랐다. 첫날의 고생을 굳이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 정류장 아닌 정류장에 내려 커다란 짐을 끌고 멈출 생각 없는 차들을 피해 길을 건널 때의 두려움이란. 택시비보다 나의 안위가 더 중요하단 걸 경험으로부터 배웠다.


택시 기사님이 기차역 앞에 내려주신 덕분에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남은 건 밤기차를 타고 15시간을 잘 버티는 일.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돌아다닌 통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잘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는 순간, 아스완까지의 여정이 순탄치 않으리란 촉이 왔다. 의자엔 폭신함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나사가 빠진 듯 균형을 못 잡고 삐걱댔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길 앉았던 걸까. 주위엔 빈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순응 속도가 빨라졌다. 누굴 탓하랴. 돈 아끼겠다고 기차를 택한 내 잘못이지.  


그때 옆자리 사람이 말을 걸었다. 외국인이라 내가 궁금했는지, 어디로 가느냐 이집트는 좋으냐 계속 질문을 던졌다. 녹음기를 재생한 듯 익숙하게 답을 해주다 보니 어느새 그 남자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지금 고향인 민야(Minya)에 가고 있고, 최근 민야에서 테러가 일어났으며, 이혼을 했다는 얘기까지 줄줄 늘어놓았다. 혼자 떠드는 게 미안했는지 중간중간 졸리면 그냥 자도 된다는 말을 끼워 넣었다. 얘기가 끊이지 않아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한 시간쯤 (대부분 듣기만 한) 대화를 나눈 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미안하지만 너무 피곤한데.."라고 운을 뗐다.


이제 자볼까 했는데, 기차에서 나를 뺀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다. 라마단이라 해가 지고부터 활기를 찾기 시작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고통받는 건 나뿐이었다. 낮 시간에 나는 (눈치는 봤지만) 물도 마시고 밥도 먹었으니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괴롭지만.

 

아침에 아스완에 도착해 곧장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다. 창밖에 맥도날드가 나타난 순간, 이 택시가 부디 빨리 멈추길 기대했다. 다행히 곧 호텔 앞에 차가 섰다. 한잠 자고 나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맥도날드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해가 있을 때 음식을 먹는 게 덜 눈치 보였다. 햄버거를 먹으며 꼬마들이 물속으로 뛰어들며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평화로운 모습에 잠이 들뻔한 그때,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너무 자연스러워 순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무튼 그 덕분에 펠루카 승선, 아부심벨 등 투어와 공항 가는 택시까지 한 번에 해결이 됐다. 엄청난 내공의 여행사 사장님이었다.


펠루카에 올라 나일강을 한 바퀴 돌았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란 드라마 명대사가 떠오르는 배였다. 선장(?) 할아버지는 바람에 따라 돛의 방향을 조절하며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왔다. 안 그래도 졸린 나를 재우려고 작정한 듯이. 같이 탄 사람들은 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노라도 되는 양 발을 물속에 넣고 앞뒤로 흔들어댔다. 신발을 벗어볼까 몇 번 움찔거리다 결국 손끝만 살짝 넣었다. 한강에서라면 안 했겠지만, 여긴 나일강이니까.




다음 날 일정은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됐다. 혹시 못 일어날까봐 불도 못 끈 채 자다 일어나 호텔에서 챙겨준 도시락을 들고 아부심벨 투어버스에 올랐다. 이 동네 호텔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투어 차에 오른 다른 사람들도 도시락 봉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다들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6시 30분. 덕분에 햇살이 덜 따가웠다.


의미는 없지만, 1등으로 입장하고 싶어 괜히 가이드 곁에 바짝 붙어 움직였다. 덕분에 관광객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그룹뿐이라 사진도 맘껏 찍었다. 가이드는 유적에 대한 설명보단 사진 찍기에 더 열중했다. 사람들에게 자리와 포즈를 지정해주고 사진 찍기에 열을 냈다. 설명이야 네이버에 찾아보면 된다...


아부심벨은 '콜라보레이션' 관점에서 흥미로웠다. 수 천년 전 람세스 2세는 자신과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지금 봐도 웅장한 규모의 이 암굴 신전을 지었고, 후손들은 약 50여 년 전 수몰 위기에 처한 이 거대한 신전을 고지대로 옮기기 위해 가짜 돌산까지 만들었다. 1960년대 이집트 정부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하이댐을 건설하고자 했다. (어릴 때 교과서에선 나일강 범람으로 이 지역이 늘 비옥했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이로 인해 수위가 60m가량 높아져 아부심벨이 수몰 위기에 처했다. 이집트만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유네스코에 도움을 요청했고, 63~66년 전문가들의 조사와 대대적인 공사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입구에 들어가니 열쇠지기들이 지키고 앉아 있었다. 삶을 의미하는 열쇠를 들고 있는 거라고 했다. 실제 그들의 역할은 관광객들이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거나 (촬영이 금지돼있지만 그들에게 돈을 내면 찍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함께 열쇠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박시시(팁)를 받는 거였다. 익숙하지만 여기선 왠지 좀 화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부가 후텁지근했다. 가이드가 돌산을 콘크리트 만들어 내부가 덥다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실제 아부심벨은 어땠까. 내부 온도와 해가 드는 각도까지 모두 계산해서 만들었을 윈 위치의 아부심벨이 궁금해졌다. 진짜이면서 가짜이기도 한 이곳을 또 수 백 년 후 후손들이 본다면, 아부심벨 이전에 대해선 어떤 평가를 내릴까.  


어쩌면 이 신전은 저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책에서만 이 곳을 볼 수 있었겠지.

아스완으로 돌아와 오후엔 아르헨티나 청년과 함께 투어에 나섰다. 투어라곤 했지만 가이드가 없었다. 운전기사와 가이드 역할을 다 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첫 목적지인 하이댐에 도착하자 우리에게 15분 뒤에 돌아오란 얘길 하곤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엔 볼 게 하나도 없었다. 댐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큰 저수지만 발아래 덩그러니 내려다보였다. 아르헨 청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게 전부냐"라고 운전기사에게 따져 물으니 그는 "난 그저 운전을 해줄 뿐이야"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미완의 오벨리스크도 비슷했다. 공사가 중단된 채석장과 같은 모습. 입장료를 낸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땡볕에 설명 하나 없는 돌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그나마 학생 할인을 받아 입장료를 반만 낸 걸 위안 삼았다. 필레섬(이시스 신전)은 그나마 볼 만했다. 설명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섬에 관광객이 둘 뿐이라 차분히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하이댐


미완의 오벨리스크
필레 신전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짐을 챙겼다. 이집트를 떠나 브라질로 갈 시간. 남미란 단어에서 풍기는 괜한 불안감에 계속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물론 남미에 발을 디딘 순간, 그러한 감정은 사라졌다) 아스완에서 카이로를 거쳐 카사블랑카(나가진 못했지만 결국 갔다고 위안)에 잠시 머물다 리우 데 자네이루 공항에 내려 호스텔까지 가는데 딱 25시간이 걸렸다. 3일에 출발했는데 도착 후에도 3일.. 정말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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