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월드컵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붉은 티를 입고 거리를 뛰쳐나오던 2002 월드컵 때조차 축구 경기를 시청하지 않았던 나다. 직접 경험해본 적 없는 스포츠라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 고3 수험생이던 탓도 있었지만, 사람 많고 시끄럽고 복잡한 것을 힘들어하는 개인 성향도 한몫했다. 낯선 이들과 한 자리에서 부대끼며 서로 얼싸안고 소리 지르는 '거리 응원'에 섞일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관련 지식이 부족하던 내게 축구란 공을 향해 스물두 명이 90분 동안 주구장창 달리는 게임으로 보였다. 특히 경기 내내 지켜봤는데 결국 0대 0으로 끝난다? 그게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 한 골도 터지지 않는다면 90분 동안 쏟아낸 모든 노력은 대체 다 어떻게 되는 거지? 삶의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를 '효율'로 생각하는 내게 축구는 정말 효율적이지 않은 스포츠 같았다.
마지막으로, 경쟁과 싸움을 힘들어하는 내게 '경기'는 낯설고 어려운 개념이다. 왜 싸워야 하는가? 그리고 왜 꼭 상대를 이겨야 하는가? 그저 우연히 각자의 나라에서 나고 자란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런 성향인지라 축구할 때도 1대 1 상황을 마주하면 100퍼센트 진다. 언젠가 우리 팀 코치님이 1대 1을 앞둔 내게 소리쳤다. "웃지 말고! 진지하게!" 난 이런 사람이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대충 사이좋게 지내면서 웃음으로 무마하고 싶은 사람.
이런 내가 지금은 매일 밤 숨죽이며 카타르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지켜본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공을 만진 지 1년도 안 되었지만, 나도 이제 축구인이기 때문이다. 이 재미있는 응원을 왜 2002년엔 마다했을까?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게 얼른 수험서를 내팽겨치고 거리로 나가 "대~한민국!"을 외치라고, 그게 네 20년의 자랑이 될 거라고 등 떠밀 텐데.
오늘도 익숙한 이름의 선수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집에 빔 프로젝터도 텔레비전도 없어서, 한국전을 할 때면 동네에 사는 친구 애인 집에 급습해 밤 늦은 시간까지 경기를 보다가 새벽에 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요즘 하루 일과다. 이러다간 4년 뒤 북미에서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 친구 애인이 나를 피해 다른 동네로 이사 가지 않을까 싶다. 미안합니다, 친구 애인이여. 4년 뒤에는 우리 집에도 텔레비전을 들일 테니 부디 올해는 나를 견뎌주세요. 부탁합니다.
축구를 잘 모를 때는 화려한 골 장면과 이후 코너킥 자리 근처에서 벌어지는 각종 세리머니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골이 터지지 않으면 90분 내내 지루함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밖에 다른 것들에도 눈을 돌릴 줄 알게 되었다.
전이라면 우리 편 진영 사이에서만 공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왜 앞으로 전개를 못 해'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저거 우리도 배웠는데. 우리 코치님이 뺏기느니 볼 돌리는 게 낫다고, 백패스 100번도 더 해도 된댔어" 하고 중얼거린다.
축구를 모를 때는 눈으로 공만 보느라 최전방 공격수들의 움직임만 들어왔었다. 이번엔 달랐다. 지난 포르투갈 전에서 나는 수비수인 김문환 선수가 상대 공격수에게서 타이밍을 뺏기지 않기 위해 치는, 초당 수십 번의 잔발만 유심히 지켜봤다. 뒤쪽에 있어 상대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도, 골을 넣은 선수가 아니라 덜 주목받는다 해도, 스스로는 최선을 다해 잔발을 쳤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겠지.
뭐든 몸으로 겪어봐야 아는 나는 이제야 축구가 90분 동안 공만 보며 달리는 경기가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의 경기가 0대 0으로 끝난다 해도, 이는 '성과 없음'으로 정리될 수 없다. 이것이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을 때 양 팀 모두에게 '승점 1점'을 주는 이유 아닐까.
심지어 '왜 국가끼리 나누어서 싸워야 해'라고 생각하던 내가 이제는 대한민국 경기를 보며 눈물을 글썽일 줄도 알게 되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울음대장인 주장 손흥민이 울 때마다 나도 같이 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얼굴 세 군데가 함몰되어 지금 뼈가 실처럼 미세하게만 붙어 있다는 그는 책임감 하나로 뛰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공중 볼 경합을 벌이는 손흥민 선수를 볼 때부터 내 마음은 울렁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답답할까. 제대로 뛰지 못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미울까 싶어서 내가 다 아프다. 그러니 그가 경기를 마치고 잔디밭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 때마다 나도 같이 울어버릴 수밖에.
가나전에서 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국가대표 선수들의 SNS에 찾아가 수많은 악플을 남겼다고 한다. 경기가 답답하고 지니까, 팬으로서 속상할 수 있다. 그러나 관중이 아무리 속상하다고 해도 당사자보다 더 속상할까.
나 역시 지금 종아리 부상과 골반 부상을 연이어 겪으며 축구를 쉬고 있는데,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 않지만 나 혼자 나를 혼내느라 분주하다. 왜 나는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해 스스로를 상처입히고, 나아가 팀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서.
포르투갈전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손흥민 선수는 본인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고 여러분들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악플을 단 사람들은 이 문장을 보고 뜨끔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쉽게 선수들을 저버리고 노력을 폄하했으니까. 가나전에서 졌음에도 우리 선수들은 포르투갈 전에 최선을 다해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고, 태극기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적었다. 이 마음이 그 많은 좌절과 악플들을 견딘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화려한 골 뒤에 가려진 선수들의 노력만 보인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몸싸움, 턱 끝까지 차오르는 밭은 숨, 수많은 잔발 치기로 인해 점점 불타는 종아리와 허벅지, 멍이 들고 피가 나고 발목을 까여도 들것을 마다하고 치열하게 달리고 또 달리는 모습까지.
6일 새벽 16강전에 진출한 우리 국가대표팀은 이번 월드컵의 강력한 우승 후보 브라질과 만나 4대 1로 대패를 겪었다. 그치만 상관없다. 이기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면 져도 무슨 상관인가. 월드컵은 4년마다 돌아오는데. 2002년 월드컵을 관전했던 이들이 20년째 그날의 영광을 곱씹는 것처럼, 2022년 선수들이 보여준 모든 순간들은 이제 우리의 자랑거리로 쌓일 텐데.
나는 귀국한 대표팀 선수들이 카메라를 향해 '국민들께 죄송하다'며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들은 '승리'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토해낸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포르투갈 전을 앞두고 돌아다니던 '알빠임?' 짤처럼,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알 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