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화내본 적 있어요?”
의사에게 이 질문을 받았을 땐 의아했다. 엄마한테 화를 안 내는 사람도 있나? 집으로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니 의사가 그런 질문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을지언정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최근에 동생과 통화할 일이 잦아졌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동료로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하소연을 나누기 위해서다. 나는 블로그에 끄적이기라도 하지만 동생은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할 테니까. 과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동생이 이 말을 자주한다는 걸 파악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 좀 서운했어.”
왜 시간이 지나서야 서운함을 표현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고 사과받은 뒤에 깔끔하게 털어내면 제일 좋을 텐데.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30여 년 함께한 결과, 그건 내 동생의 반복되는 패턴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참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같이 화를 폭발해내는 사람. 그럴 때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왜...’ 하고 생각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사람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그렇게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고 그냥 어물쩍 넘어간 게 함께한 세월의 수만큼 많으리라.
그 모습을 보고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동생이 내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아 그 애가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같은 행동을 계속한 것처럼, 엄마도 내가 싫어하는 부분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도 있겠구나. 엄마는 내게 묻지 않았고, 나는 엄마에게 표현한 적 없으니까. 어쩌면 엄마는 내가 이토록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겠구나. 말한 적 없으니 알 길이 없겠지.
이는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왜 이미 살 만해졌는데도 자꾸만 ‘가난’이라는 불안감에 불분명한 투자를 계속하는지, 왜 동생과 나의 신용을 자신의 가용범위 안에 집어넣는지. 왜 나와 동생을 독립된 가정이라 받아들이지 않는지. 직접 묻는 대신 짜증으로 일관하고, 가끔은 크게 윽박질러 엄마의 입을 막았다. 동생이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면, 엄마는 우리가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오늘 《나는 엄마가 먹여살렸는데》를 집필한 딸세포출판사의 김은화 대표와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를 집필한 최숙희, 우정아, 박경화 작가의 북토크를 다녀왔다. 어떠한 연유로 자신의 엄마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그의 목소리를 듣기로 결심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이해와 치유가 이루어졌는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누구도 묻지 않아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엄마의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나 또한 그에게 마이크를 가져다대고 묻고 싶다.
엄마,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