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Jan 13. 2024

<와일드 투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모험

야마구치 아트센터 '야마구치 DNA 도감' 워크숍의 진행자로 참가하게 된 대학생 ‘우메’. 참가자들과 함께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떤 식물이 자라고 있는지 조사한다. 우메는 중학교 3학년인 '타케'와 '슌'을 데리고 새로운 종을 찾기 위해 근처 숲을 탐험하는데..

영화는 아이폰 동영상 촬영음과 프레임 속의 탐조로 시작한다. 그 후에 이어지는 숏은 배관 아래 흔들리며 리드미컬한 소음을 내는 나뭇잎, 그냥 흐르는 물, 아무것도 아닌 나무에 관한 영상들. 그 쓸데없고 평범한 것들을 프로답게 찍지는 못해도 공들여 찍는 사람들. 쓸데없는 것을 유독 좋아하는 (나와 나의 친구들 같아서 더 내 얘기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을 찍는 카메라.

아이들의 세계는, 문장과 감정은 이미 지나와서 잊어버린 이들이 짐작 못할 만큼 깊다. 누군가의 첫사랑과 그 사람의 첫사랑. 고백하고 거절당한 사람과 고백도 안 해보고 보낸 사람이 같은 프레임 안에서 얼굴을 겹치며 웃고 소년들은 금방 자란다.

그들은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헬멧을 쓴 아저씨’가 나와서 직접 제지하지 않는 한. 타케와 슌뿐만 아니라 모든 소년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판을 ‘웬만하면’ 무시한다. 마구 - 와일드하게 - 선 안으로 진입한다. 어른들의 요식적 규칙은 이 아이들에게 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투어이기 때문에 아무도 무리하지 않는다. 산길이 미끄러우면, 뚫는 것이 불가하면, 늪이 깊으면 ‘더 가보자’ 대신 ‘이제 그만 가죠, 돌아가요’라고 하는 여행. 미야케 쇼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공간에 후행한다. 이야기를 위해 공간을 재배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찾으면 거기 맞는 이야기를 그때 써낸 것만 같다. 그의 영화 속에서 자연은 대상(풍경)이 아니라 주체의 자리로 옮겨온다. 맑고 깨끗하고 작은 것들이 영상 속에 가득 다글다글거린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를 연상시키는 귀엽고 긴장 넘치는 삼각관계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고요한 정념. 미야케 쇼라는 동시대 감독의 성장을, 그 시작점 같은 첫 영화를 숨죽이고 지켜보는 건 얼마나 기꺼운 일인지.

모든 잔치가 끝난 후 그걸 끊임없이 아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열심히 채집할 때의 외로움과는 사뭇 다르다. 이 감독은 분명 나와 우리와 함께 자라고 있다. 그러니 늦기 전에 어서 빨리 이 투어에 함께 올라타자고 말하고 싶다.



타케: 지금 필요한 것은?
슌: 즐거운 시간이요.
우메: 지금은 즐겁지 않아?
슌: 지금도 즐거워요.
타케: 더 즐겁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즐거운 시간이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거야?
슌: 맞아요.
타케: 그렇구나.
우메: 좋네.
매거진의 이전글 2023 영화 결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