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놀라운 신예였으나,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거장의 반열에 오른 하마구치 류스케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놓고 불가사의를 자처한 제목을 통해 다시금 감독의 영화적 야심을 내보인다. 돌이켜보면 그는 젊은 영화 제작자들 중에서도 유독 어떤 신화처럼 느껴지는 일화들을 줄줄이 매달고 다니는 감독이었다. 아사코 1&2라는 독특한 제목, 직접 연 배우 워크샵에서 완전 무명의 배우들을 기용해 무려 6시간(해피아워) 혹은 3시간(드라이브 마이 카)짜리 영화를 만드는 용감한 시도, ‘노렸다’고밖엔 느껴지지 않는 최근 작품들에서의 매우 정교한 상징들과 다소 시시할 정도로 모범적인 설계, 그리고 업계가 그의 그런 노림수에 성실히 부응해 되돌려준 화려한 수상목록까지.
프랑스나 대만 뉴웨이브 시절의 ‘이상한’ 감독들 혹은 가까이는 홍상수와 이창동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완고하고 본능적인 작업 방식, 작풍, 배우론, 입고 말하는 방식까지. 정작 하마구치 류스케 본인은 기행 없이 성실하게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겠지만, 평단과 관객에게 그는 항상 어딘지 힙스터적 혹은 고전적 낭만을 담지하는 류의 감독으로 받아들여져 온 듯하다.
그런 그가 그간의 영화들에서 다루려 한 공통지대는 외려 그의 배경보다 훨씬 깔끔히 요약될 수 있다.
1) 헐겁고 불완전한 관계나 그 잔여물을
2) 단단하게 잘 짜인 무대로 데려와서
3) 침묵과 호흡과 생략된 것들까지 발라낼 듯 끈질기게 조망하는 것.
그런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그는 이 무대에 자연주의라는 하나의 관점을 더 마련한다. 마련 정도가 아니라 이번에는 관계가 아닌 그 자연 자체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 이후 “전례 없는 캠핑 붐”으로 인해 평화롭고 자족적인 마을에 글램핑장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메인 위기이기 때문이다.
오버투어리즘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기 때문에 도시 거주자로서 찔리지 않을 수 없는 영화 속에서, 글램핑장으로 인해 사슴의 길이 없어진다는 우려에 “(사슴은) 다른 어디론가 가겠죠?”라는 관계자의 태평한 물음은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손쉽게 지목 가능한 대적자가 된다. 더군다나 마을의 선주민, 모두의 일꾼인 타쿠미의 외동딸 하나는 총 맞은 어린 사슴에 즉각 유비되는 존재이기에, 하나의 부재/실종 혹은 죽음은 마을의 죽음이자 자연의 훼손과 직결된다. 뻔뻔한 도시는 자기들의 오수와 산불을 연고 없는 지역에 풀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난 심부름센터야. 이 마을의…”라는 타쿠미의 자기 규명에서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방인 마유즈미처럼)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위엄과 자부심을 읽어내는 이들도 있지만, 영화 속 도시의 건설업자와 엔터업계 사람들은 그를 ‘왠지 한가할 것 같은’ 직업 없는 시골 남자라고 받아들이고 만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는 물론 보수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시골 대 이기적이고 개발/자본만능주의인 도시로 구도를 단순화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심지어 완전히 자연의 ‘편’이라거나 완전히 우호적인 시점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 다가오는 타쿠미와 카즈오를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땅와사비나, 돌봄교실 운동장에서 후진하는 차처럼 특이하고 귀여운 시점의 숏이 여러 차례 등장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어떤 도덕적 판단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마구치의 렌즈는, 타쿠미가 죽은 사슴이나 사슴사냥 자체에 그 어떤 감정도 의견도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이, 자연을 그저 관조한다. 타쿠미에겐 ‘먼 곳이다’ 또는 ‘반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입각한 설명이 있을 뿐 ‘불쌍하다’ 혹은 ‘안 된다’처럼 으레 기대될 법한 반응이 없다. 그렇게 발견된 자연은 인간의 선악이 없는 세계, 그러나 유지 가능한 균형을 깨면 무참히 처벌/단죄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타쿠미가 “아직 찬성도 반대도 아냐”라고 말한 것처럼 하마구치 역시 자연의 편도 인간의 편도 아닌 ‘균형’의 편을 들었다고 볼 수 있겠다.
관객이 이입하기 쉬운 캐릭터가 마유즈미였다면 감독의 대변인이 분명한 인물은 타쿠미와 이장 스루가가 있었는데, 이 둘은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카즈오/미즈누라 커플, 탈색한 청년, 뒷자리 노인처럼 강경한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고 일단 지켜보기를 택하는 타입의 인물이다. 타쿠미는 결국 (꿈처럼 느껴지는 마지막 벌판에서의 일격 이전까지) 찬성인지 반대인지 명확히 밝힌 적이 없었다. 스루가 역시 “환경보호니 뭐니 하는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고 밝히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즉 상류의 책임과 균형의 문제로 이 갈등을 바라보고 있음을 명시한다. 어린 하나의 실종으로 마을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노인인 스루가는 수색에 동참하지 않고 집의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시선으로만 등장하는데, 여기에선 어쩐지 현상을 현상 그대로 바라보고 그 어떤 행동도 더하지 않으려는 유보, 즉 섭리에의 순응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것이 하마구치가 이 영화에서 취하려 한 태도의 대표적 예시일 테다. 이럴 때마다 타쿠미와 스루가의 얼굴은 거의 감정이 제거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절제되어 있는데 이 무의 영역이 도리어 이들을 마을/자연의 보호자와 같은 신적 존재에 가깝게 느끼게 만든다.
유보적 판단의 빈칸을 먼저 채우는 것은 하마구치의 장기인 사람의 이면에 대한 섬세한 응시다. 무지하고 한가로운 발화로 분노를 사며 등장한 도시의 엔터회사 직원 다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겐 (역시 하마구치의 장기인) ‘차 안에서의 대화’라는 기회가 주어진다. “생각하시는 것만큼 주민들은 바보가 아녜요”라고 마을 편을 들며 거래처와 사장에게 반격한 젊은 여성이나, 그저 욕심 없이 흘러오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을 뿐인 장년의 남성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그 어떤 악의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현 직업에 대해 “생각한대로 쓰레기 집합소”라고 신랄한 평을 남기고 그런 업계에 “변화를 주려고” 진입했다는 마유즈미의 굳건함은 관객이 동화하기 쉬운 지대다. 그들은 때론 마을에 감화되고 마을을 재발견하며 마을과 자신의 삶을 겹쳐보려고 하기도 한다.
‘알고 보니 이들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단순한 언술을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대화로써 길게 늘어놓고 보는 이가 충분히 적셔지기를 바라는 제작자의 태도는 하마구치의 전작뿐 아니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떠올리게도 한다. 다정하다면 다정할 응시에 설득되지 않을 관객은 없다. 하지만 결국 삶이 엮여있지 않은 비당사자의 입장이란 지나치게 나이브하기 쉬운 것이라서, 도시인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 타쿠미의 ‘유보’를 깨트리고 심경을 복잡케 하는 말을 하고 만다.
(다카하시) 아까 장작을 팼을 때 최근 10년간 중에 제일 기뻐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구나 싶었어요.
…
(타쿠미) 정말 단순한 사람들이네.
(마유즈미) 사슴이 사람을 해쳐요?
…
도시에 살면 야생동물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으니까, 오히려 사슴이 지나다니면 좋지 않을까요?
끝까지 자기가 산 땅에 와보지 않은 사장도 건설업자도 마유즈미와 다카하시와 마찬가지로 악의는 없었을 테다. 그저 조금 더 노련하게 양심을 죽일 줄 알 뿐이다. 모두에게 악의가 없으나 너무 심각한 수준의 무지가 결국 마을/자연 기준의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결국 이 특정한 침범은 균형을 깰 운명으로 예고되어 있었고, 마을의 보호자인 타쿠미는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하마구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평서형의 선언이 아니라, ‘무엇을 악으로 부를 것인가?’의 의문형의 제언에 가깝다. 어떤 선을 넘어간 수준의 무지는 곧 악이나 다름없다는 게 그의 잠정적 대답이기도 하다.
그동안 인간이 만드는 관계를 주로 탐닉하느라 바빴던 하마구치지만, 이번 작에서는 이렇게 소위 사회파 영화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기색이 보인다. 자연뿐 아니라 그가 그간 조망하지 않았던 계급과 지역성의 문제가 갑자기 도드라지는 부분들이 있다.
지금은 이쪽에 앉아있지만, 사실은 그쪽에 더 가깝습니다.
이주민이자 우동 가게 주인인 미즈누라와 카즈오의 정체화는 매우 흥미롭다. 오히려 완전히 이방인인 도시 사람들보다 더 분명하게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감지하고 있음이 티나기 때문이다. 미즈누라가 주지했다시피 이들은 타쿠미와 같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나 인정 없이는 가게를 지속할 수도 없는 처지다. 미즈누라와 카즈오에게도 오롯이 선의만은 아닌 경계를 내보인 선주민이 왜 없었겠는가. 이들은 ‘받아들여진’ 이주민으로서, 이주를 가볍게 희망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다카하시 역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언젠가 이들처럼 어울려 살 수도 있지 않았을지 상상케 만드는 위치에 있다.
이런 미즈누라의 발언을 타쿠미가 이어받는다.
난 농지개척 3세대야.
이곳은 패전 후 토지 개혁을 통해 소작인에게 개척용으로 주어진 땅이야.
역사는 길지 않아. 어떻게 보면 모두가 이주민이야.
사실상 타쿠미의 자기소개는 엔터회사 직원들이 아닌 미즈누라를 향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즈누라가 무심결에 그어놓은 경계선을 타쿠미는 황급히 또 익숙하게 지워버린다. 이쪽과 저쪽, 선과 악, 자신과 타자가 나누어지는 순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그는 이미 목도했거나 개척 3세대의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 알고 있다. ‘패전’ 그리고 ‘소작인’ 같은 단어들의 울림이 그의 선언을 뒷받침한다.
그러니까, 제목은 한껏 어려운 질문인 체하지만 정답은 맥 빠질 정도로 쉬이 주어진다. 타인의 고통에 호소에 감응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해지는 일을 경계하자는 것. 완전히 모범적인 예시도 다카하시와의 비교 대조를 통해 제시된다. 외부에서 협응하는 이방인 마유즈미와, 내부로 진입해 훼손 없는 동화를 꿈꾸는 미즈누라.
분명 좋은 영화지만,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과 로케이션 나가노현 후지미마치의 풍광이 경외감을 한층 더 깊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구치가 바란대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까지는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다. 이 영화는 오히려 답안지 같은 영화에 가깝지 않나. 동시대 가장 ‘천재적인’ 감독이라는 극찬에도 5% 정도 불복하게 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원숙한 기술자고, 성실하게 기이함을 꿈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안전하고 정교한 길을 따르는 모범생이고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세대/국가를 좁혀 생각한대도 여전히 미야케 쇼의 감각이 훨씬 더 본능적이고 역동적이며 영원히 비주류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다. 어찌됐거나 두 쪽 다 동시대에 존재해서 고맙고 좋은 감독임은 확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