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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07. 2024

<로봇 드림>,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자기보다 못난 이를 기어이 끝까지 사랑하고야 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늘 나의 것처럼 귀히 여기고 궁금해하게 된다. 모두 닮았으니까. 가장 이해하기 편하니까.

못나다-는 객관적이지 않다. 부족하다-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누구에게 잠시 신이었던 사람이 내겐 하잘것없는 찌꺼기밖에 안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게 값진 것이 저기 저 사람에겐 전혀 아닐 수도 있고. 사실 누군가 바라는 방식으로 바라는 것을 채워주지/비워주지 못하는 모두가 서로에겐 못난 이다. 타인이 죽어라 노력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의 노력 자체가 전혀 쓸모가 없을 때가 있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 꼴보기 싫어질 때가 있고. 그런 쓸모의 판단에 있어서는 모두가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냉정해진다. 반대로 나의 쓸모나 의도는 항상 사실보다 조금은 더 너그러이 평가받길 갈망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성의 한계.

작가 사라 바론이 창조하고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가 다듬은 <로봇 드림>은 이 사랑의 한계를 직면하기 위한 작품 같다. 원작 그래픽노블에서 단 2쪽으로 개와 로봇의 첫 만남(주문서 작성-택배 도착-조립-탄생)을 다루는 것과 달리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는 꽤나 공들인 도입부로 도그가 로봇을 ‘사게’ 된 배경을 제시한다. 도그는 외롭다. 늘 혼자 먹고 보고 잠드는 도그는 사무치게 외롭고, 함께인 동물들을 질투하며, 우울할 정도로 삶을 지겨워한다. 도그는 자기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타인의 시선, 손길, 인정, 교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도그는 자기 친구, 애인, 가족이 되어줄 로봇을 구한다.


우연히 광고를 통해 발견한 로봇을 구매해 조립하는 도그의 행위는 역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의 계보 -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괴물,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와 그의 괴물, <총몽>의 이도와 알리타, <가여운 것들>의 갓윈 백스터와 벨라 백스터 - 를 따르는 듯하다. 앞선 사랑들과 마찬가지로 도그의 사랑도 최초에는 자기 목적을 위해 로봇을 도구로 활용하기에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도그의 사랑은 현대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서 순수성을 훼손당한다는 한 가지 약점을 더 안고 있다. 로봇을 직접 발명한 것도 아니고 로봇에게 '태어나고 싶은지' 묻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그를 얻었으므로, 도그의 사랑은 로봇에게 필요할 만한 장기를 고심하고 직접 채워준 라스칼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앞선 사랑들과 마찬가지로 상호 응시, 상호 이해(라는 환상), 상호 부재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으로 이 맹점들은 어느 정도 극복된다. 일단 로봇을 처음 만난 이래로 도그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로봇을 아꼈고 로봇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로봇이 해변에 홀로 남겨졌을 때 그는 자기 다리를 떼어 뱃전의 구멍을 메우려는 토끼, 고물상에 팔아 돈을 벌려는 원숭이, 몇 초의 유희를 위해 그를 아예 파괴해버리는 악어 부자를 만난다.

노골적인 착취를 전시해 도그와 로봇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무구한 것인지 대비하려던 이 씬은 약간의 역효과를 낸다. 로봇이 물에 닿으면 녹슬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걸 몰랐던, 즉 상대를 잘 모르지만 일단 ‘나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 주려던 도그의 미숙하고 일방적인 사랑은 과연 다른 동물들의 이기적 활용/착취와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하는 - 사랑의 본질에 관한 찝찝한 질문이 남기 때문이다.


내게 좋은 것이 상대에게도 좋은 것인지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도그 옆에서 로봇 역시 잘 모르지만 자신의 최선을 다해 도그의 감정에 부응한다. 로봇은 Earth&Wind and Fire의 September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너무 빠르게 도는 바람에 도그를 어지럽게 만들고, 도그와의 비디오 게임에서 완벽한 컨트롤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도그를 지루하고 힘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또 도그의 손을 너무 세게 쥐어 비명을 지르게 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재빨리 행동을 수정한다. 자기라는 틀을 깎아 타인의 감정을 우선하는 이 행위는 관계 자체의 성숙을 가능케 하는 기본 조건이다. 로봇은 점차 ‘업데이트’되며 도그가 원했던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 채고 제공한다(어쨌거나,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니까).


홀로 남겨져 겪은 고난의 연속 중에도 로봇은 도그에게 헌신적이다. 혼자 누운 채로 로봇은 돌아간 집에 도그가 없는 악몽, 돌아간 집에 도그가 자기와 정확히 같은 모델의 다른 로봇과 함께 하고 있는 악몽, 돌아간 집이 연극 무대 세트처럼 허상이 되어 쓰러지는 악몽을 꾼다. 꿈이 점점 비현실이 되어가고 스케일이 커져가는 동안 현실의 육체는 제비 가족의 둥지가 된다. 조금 약하고 다르게 태어난 한 마리의 아기 제비가 성장하는 것을 열심히 돕다가 결국 그 제비가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날아올라 떠나가기까지 할 때, 로봇은 모든 헤어짐이 사랑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사랑해서 존중하며 보내주는 이별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도그는 몇 번이고 로봇을 되찾으러 해변으로 침입할 시도를 했지만 굳어버린 로봇은 알 수 없었으니, 이제는 도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영영 오지 않는 건 아닐지 점점 의심과 불안이 커지는 중이었을 테지만 아기 제비와 교감하며 타자와 맺는 관계 각각의 복잡다양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 - 제비의 날갯짓을 따라하는 입 모양 -를 통해 소통하기, 철 따라 날아다녀야 하는 제비가 가족을 뒤로 하고 로봇과 영영 살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고 등 떠밀어 보내주기. 정말로 순수한 사랑의 이상을 체험하며 로봇은 자신도 모르게 도그와의 완전한 이별을 준비하게 된다.


물론 도그와 로봇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도그 역시 로봇의 헌신적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그것을 로봇에게도 되돌려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도그가 설명서를 한 번만이라도 읽어봤다면 로봇을 물에 닿지 않게 했을 것이고 둘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도 상상할 수 있다. 만약 로봇과 도그가 아무 어려움 없이 계속 함께 했다면 도그는 로봇의 인간(동물)답지 않은 실수, 예를 들면 게임에서 21승을 거두는 것, 함께 사진을 찍을 때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 것 등등에 마음이 상하고 질려서 로봇을 더이상 소중히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해변으로 갈 때 도그는 보지 못했지만 로봇은 본 장면 - 버스 옆을 지나는 차 안의 흠집 많은 로봇이 뒷좌석의 아이에게 머리를 탕탕 소리나게 맞으며 단순 유희거리가 되고 있는 것 -이 그들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장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수많은 ‘만약에’가 남지만 원래 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법이 없으니까. 다행히도 도그는 유럽으로 이주한 오리를 붙잡지 않고 보내줌으로써, 새 로봇 친구를 바닷물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게 함으로써 자기 나름의 깨달음에서 온 배려와 존중을 실천하고 있다. 로봇뿐 아니라 도그 역시 서로가 있었기에 원본의 자기 자신에서 변화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결말에서 로봇은 창 밖의 도그를 보고도 붙잡으러 가지 않는다. 이때 로봇이 도그를 발견한 창은 동그란 모양으로, 도그가 남들의 삶을 훔쳐보고 부러워하던 통로인 네모난 창틀과는 상반된 형태다. 정수 작가님의 글을 인용하자면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 틀은 직선적​이고, 이 직선들이 규정하는 나와 타자의 분명한 경계에 의해 자유로운 감정들은 제약받는다.

“곡선은 두 점 사이를 잇는 방식이 구불구불 무한대인 반면, 직선은 두 점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을 수 있는 한 개의 선이다. 그래서 곡선은 무수한 변수와 오차가 가득한 반면, 직선은 곡선의 우회나 여유로움이 허용되지 않는다. 직선에게 곡선은 다름이 아닌 '틀림'이요 입력 오류다. (…)

특히나 '다른 힘'을 허용하지 않는, 오직 하나의 정형화된 힘만 허용하는 직선적인 세계에선 지루함은 더 급속도로 찾아올 것이다. 리모컨, 게임기, 자동차 모두 다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며, 심지어 자동차는 떨어진 두 공간을 잇는 가장 효율적인 공간인 '다리'만을 횡단하니 말이다.
(…) 동물들은 상대를 다름이 아니라 틀리다고 곁눈질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거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이들은 몹시 바빠 보인다. 아마도 그들 자신의 직업적 목적이 있을 것인데, 이에 유용하지 않거나 방해한다고 일컬어지는 타인을 날카롭게 째려본다. 뿐만 아니라 도그의 집은 다중 잠금장치로 잠겨서 쉽게 현관문을 열 수 없는데, 그 문이 열리는 짧은 순간은 도그의 목적에 부합하는 택배가 도착했을 때요,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 '문'은 도그의 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해수욕장이 폐쇄되는데 도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당국이 규정한 목적 외의 개방은 허용되지 않는다. 도그가 원하는 개방은 이종 간 우정으로서, 정작 합법적으로 문이 열렸을 때 로봇은 사라지고 없다. 할로윈 행사도 마찬가지로 어른들은 사탕을 주고, 아이들은 사탕을 받는 역할에만 단단히 얽매여 있다. 이 목적을 효율적으로 관통하는 직선 외 곡선의 반응은 감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그는 외롭다.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오직 곁에 남는 것은 일방적으로 지시/명령내릴 수 있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정의 대상은 로봇일 수밖에 없다. 서로를 목적으로 대하다 보니 우정이나 사랑은 너무나 쉽게 불발하고, 제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친구란 오직 우정이란 목적에 따라 탄생한 발명품인 로봇뿐이기 때문이다.”


“베르헤르는 직선을 깨트리는 곡선의 무궁무진한 가변성을 순수 이미지로 부각한다. 도그가 로봇을 조립하는 과정을 창밖 너머의 비둘기들이 구경하고 있다. 이 장면은 상반된다. 도그는 광고를 보고 로봇을 샀다. 그렇기에 광고를 시청한 다수의 외로운 시민들이 동시에 로봇을 구매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지금쯤 설명서를 따라 똑같이 로봇을 조립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행동엔 한 치의 오차도 없을 반면, 비둘기는 조립이 끝난 로봇을 보고 화들짝 놀라서 달아난다. 직선이 천편일률이라면, 곡선은 예기치 못한 천차만별이다. (…) 이성은 로봇을 조립하여 생명력을 부여하는 반면, 그 옆에서 놀라 자빠지는 감성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https://brunch.co.kr/@quinpe/833


직선적 목적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으나 로봇은 이미 그 목적을 한참 상회한 존재가 되었다. 로봇은 사계절의 고난과 부활을 겪었으며, 자기를 쓰레기장에서 구출해 새 몸을 만들어준 라스칼과 밀도 높은 우정의 시간을 쌓아왔다. 도그 역시 로봇이 없는 동안 눈썰매장의 개미핥기들, 어린 코끼리들이 만들고 자기가 옷을 입혀준 눈사람, 연 날리며 만난 오리 등등 새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조롱당하거나 헤어짐을 통보받으며 좌절했으면서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새 로봇을 구해 그와의 관계에 정착한 상태다.


달라진 서로를 재발견한 순간은 곧 로봇과 도그가 욕심을 부리려면 부릴 수도 있는 순간이다. 강렬했던 추억은 언제나 힘이 세기 때문이다. 기존의 프랑켄슈타인 서사에서 창조물들은 - 가장 난폭하고 제멋대로였던 자유의지를 가진 벨라 백스터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조차 - 대체로 주인의 의지에 반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그가 원하는 감정적 교류를 제공하는 결말을 보여줬지만,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은 분명 객체였던 것의 주체로의 변모/도약을 보여주기에 한층 더 고귀하고 인간적이게 느껴진다. 각자의 좋은 파트너들이 상처 받기를 원치 않는 로봇은 과거의 미숙하고 순진했던 사랑을 다시 끄집어내기보단 도그와 자기 자신의 현재를 존중하기로 마음 먹는다.


불가능한 복원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의 태생적 한계 - 이기성, 목적성, 효율성이나 자기중심성 -들이 일시에 극복된다. 추억이라서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내가 알던 (모자랐지만, 미화되고 이상화된) 네가 지금의 너와 다르고 사실 그때도 너와는 달랐단 사실을 인정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과거도 현재도 훼손되지 않는다. 다시는 만날 수 없어졌는데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로 말미암아 성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도그는 춤추며 로봇에게서 멀어지고 로봇은 라스칼과 새로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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