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스부르크(2003), 유령(2005) 그리고 페트라(1998)
페촐트 영화에서 사랑은 언제나 (계급적) 전락을 동반한다. 이미 떨어져 있던 이들끼리 사랑하거나(쿠바 리브레/페트라/내가 속한 나라/옐라/열망), 사랑하는 바람에 자기방어가 해제되어 떨어지거나(볼프스부르크/유령/바바라/트랜짓/운디네), 아직 다 안 떨어진 줄 알고 사랑을, 혹은 사랑하지 않음을 위장하다가 정말로 완전히 떨어지거나(쿠바 리브레/피닉스/어파이어).
또한 페촐트식 치정은 기본적으로 배신과 불신을 수반한다. 때로는 강도, 사기, 심지어 의도적/우발적 살인까지 수위 높은 범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분단, 난민, 퀴어와 질병의 코드를 지닌 최근작으로 올수록 이 범죄성은 오히려 옅어지고 있단 점이 흥미롭다.
페촐트를 베를린파 감독으로 분류할 때 근거로 언급되는 후기작들은 역사성과 공간성에 의도적으로 몰입한다. 그에 반해 초기작들은 훨씬 더 멜로드라마적이다. 이 초기작들은 역사성을 거의 내재하지 않은 ‘지금, 여기(베를린)‘에 관한 이야기이며, 계급성과 빈곤, 성별화된 노동에 대한 (다소 피학적이고 자극적인) 탐구를 전제로 한다.
<바바라> 이후의 네댓 편을 보는 동안은 몰랐는데 2000년 전후의 작품들을 보며 깨달은 또 한 가지는, 페촐트가 익숙한 반복에서 자기만의 미학을 길어올리려고 하는 타입의 감독이란 사실. 한 번 기용한 배우를 최소 두세 편 이상 연달아 출연시키며 정반대 역할로 활용하는 버릇이나, 조감독으로 일하며 연을 맺은 하룬 파로키와의 공동 각본 집필 등이 이런 연작을 연상케 하는 변주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초기작 세 편 동안 떠돌이 강도였다가 그 강도를 잡는 경찰이었다가 좌파 테러리스트로 변신하는 리키 뮐러의 우수에 찬 짱돌 같은 얼굴이나, 분단 시절 동독의 선한 의사였다가 유대인 아내를 밀고한 독일인 남편으로 분한 로날드 제르펠트의 비열함/다정함을 모두 가진 양면적 얼굴.
엄마를 잃어버리고 사랑을 갈구하며 도시를 누비는 고아 니나였다가, 낳아준 이의 일방적 선택에 자기 삶이 너무 달라붙어버린 바람에 억울하게 대가를 치르는 10대 소녀 잔느가 되는 줄리아 험머의 혼란스럽고 가녀린 표정들(그는 페촐트 영화에 등장한 모든 여성 인물 중 가장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유령의 이미지에 부합한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며 과거의 나이 든 연인에게 돈을 빌리던 정치범 엄마였던 바바라 오어는 다른 여자(옐라)의 시선에 처하며 재등장했을 때는 그 부유한 연인의 저택에 함께 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아내다.
그중에서도 <바바라>와 <피닉스>에서 이미 지치고 닳은 어른이었던 니나 호스, 그의 앳되고 고뇌에 찬 얼굴을 <옐라>와 <열망>에서 재확인한 후, <볼프스부르크>를 마지막으로 보며 너무 어려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아름다움을 새로이 덮어씌우는 즐거움이 단연 가장 크다. <트랜짓>에서 익사한 마리가 <운디네>에서 물의 신으로 살아돌아온 것만 같아 서글픔을 안겨줬던 폴라 베어도 마찬가지다. <어파이어>까지 연이어 세 편을 찍었고 차기작도 출연한다는 1996년생의 젊은 배우는 니나 호스에게 뒤지지 않는 무게감을 이미 획득했다.
<쿠바 리브레>와 <페트라>의 서로 닮은 도둑질은 <내가 속한 나라>의 정치범 부부 서사를 위한 습작처럼 느껴진다. 각기 다른 영화에서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야”라며 과거의 배신을 참회하고 과거의 여자를 잡아두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던 밑바닥 남자들(리키 뮐러의 톰, 볼프람 베르거의 도둑)은 <쿠바 리브레>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서로를 애증한다.
<쿠바 리브레>, <페트라>, <유령>, <트랜짓>까지 페촐트는 떠돌며 서로를 찾아다니는 인물들이 엇갈리는 순간에 상당히 많은 장면을 할애하고 그때마다 코미디적 문법으로 비극을 구현한다. ‘페촐트의 모든 영화가 유령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송경원 평론가의 말대로, 어쩌면 페촐트 영화에서는 이 배회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단 하나의 소재일지도 모르겠다.
<쿠바 리브레>, <페트라>, <볼프스부르크>와 <내가 속한 나라>까지 초기작에서 주연이나 그들이 사랑하던 이들이 전혀 예고되지 않은 죽음을 맞는 계기나 방식도 닮아있다. 갑작스레 차에 치이거나 차가 전복되거나 차에 탄 채로 물에 빠지거나 차에 탄 채로 불에 타는 비극은 비교적 최근작인 <옐라>, <열망> 그리고 <어파이어>까지도 이어진다.
사실상 <트랜짓> 역시 마리가 타고 떠난 배의 폭파 소식이 게오르그에게 전해짐으로써 끝맺는 영화임을 생각하면, ‘탈 것’ 안에서의 죽음이라는 소재가 페촐트를 20년 가까이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음은 분명하다. 도시 빈민 즉 구조적으로 유기된 사람들의 삶에 천착해온 페촐트이기에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사고사의 숙명적 속성에 매료된 걸까.
또 대부분의 작품은 누군가 차를 타고 가는 오프닝으로 막을 연다. <어파이어>에서 레옹과 펠릭스가 타고 가던 차가 고장난 장면은 똑같이 차를 타고 가며 즉각 사건이 시작되는 <볼프스부르크>, <옐라>, <피닉스>와 마찬가지로 극의 나머지 흐름을 결정하는 주요한 복선이 된다. 대놓고 하이스트-로드 무비인 <쿠바 리브레>, <내가 속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페촐트 작품 중 결말부에 확실한 죽음을 알리지 않는 건 오로지 <유령>과 <바바라>, <피닉스> 그리고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신으로의 부활을 암시한 <운디네>뿐이다. 그 영화들은 육체의 죽음 대신 또다른 코드를 공유한다. 영영 떠나버린 여자들. 망연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니나와 바다를 응시하는 바바라, 결연한 표정의 넬리와 운디네는 화면 바깥으로 자진해서 멀어진다.
페촐트의 여성을 향한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분명 시간과 경력의 축적으로 변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어딘가 착취의 느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페촐트 영화의 여성들은 예외 없이 남성보다 훨씬 두드러진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넓게 보아 두 가지 분류 안에서만 영원히 떠도는 것 같다.
아름다워서 욕망당하는 여자 - 페트라, 옐라, 로라(열망/볼프스부르크), 바바라, 마리, 나디아.
직접 욕망하지만 선택받지 못하고 버려지는/아름다움을 잃어서 다시 되찾으려고 하는/아직 아름다울 나이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이를 작위적으로 추구하는 여자 - 티나, 프란치스카, 니나, 잔느, 넬리, 운디네.
특히 전자의 여성들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욕망당한다는 점 그 자체에 고통의 원천이 있다.
<페트라>와 <볼프스부르크>, <옐라>, <열망>까지 (경력단절을 벗어나) 이 외모에 의한 제약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쓸모 있는 노동자가 되고 싶어 분투하는 여성들의 행렬이 있다. 그들은 자기증명을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의 노동은 ‘여성의 노동’에서 ‘노동’이 아닌 ‘여성’에 주목하는 영화 내/외부의 남성적 시선에 따라 제한되고 재단된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은 꽤 자주 매춘의 성격을 띠게 된다. 영화 바깥에 위치한 초기의 페촐트는 대체로 이 문제에 대해 메타적, 고발적 관점을 취하지만 때로는 그 문제적 시선에 그저 영합한다.
“난 창녀가 아니야”라고 여러 번 자기암시하듯 왼 언니 페트라의 노선을 결국 최악의 방식으로 따라간 프란치스카는 극중에서 명시되듯 “배운 여자”다(이 ‘배운 여자’ 자체가 초기 페촐트 작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존재, 그나마도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존재다). 페촐트는 <페트라>에서 결국 프란치스카를 치워버리며 학력이나 정당한 노동을 통한 빈곤의 극복을 전면 부정하고, 언니 페트라의 ‘자발적’이고 불완전한 성노동만 남은 독일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려던 듯하다.
그러나 최근작들에서 그는 이 배운 여자들 - 의사 바바라와 가수 넬리, 박물관 학예사 운디네와 문학 박사 과정 중에 있는 나디아 -의 품위 있는 똑똑함과 그 지성이 빚는 비극에 돌연 집중한다. 이 변화는 프란치스카와 페트라 시절, 티나와 클라라 시절에 대한 참회일까. 다른 말로 한다면 시대가 바뀌었고 여자들은 그의 예측만큼 순응적이지 않은 존재였다는 깨달음에서 기인했을까. <어파이어>에서 그가 문학 박사생 나디아의 시선을 취해 작가 지망생 레온을 죽어라 놀리고 비난하는 것을 목격했기에 나는 그렇게 선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