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3/29 여성신문 기고는 이 리뷰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스크린을 장악하는 비주얼 아트의 측면에서 논하자면 <듄 : 파트2>는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예술 그 자체다. 아름다운 바다를 목전에 두고 자란 고귀한 소년이 가문의 멸족을 겪고, 등 떠밀려 전사, 예언자, 통치자의 숙명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야기는 동방의 관객에게도 익숙한 복수/성장극의 내러티브를 따른다. 척박한 사막을 개척하는 구원자 서사에서는 북미 대륙의 백인들이 갖지 못한 건국 신화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갈망이 삐져 나오기도 한다. 평생 듄의 세계관을 경애했다고 밝힌 드니 빌뇌브 감독도, ‘일부러 중성적 매력이 있는 배우를 골랐다’고 알려진 회심의 캐스팅 티모시 샬라메도 낭만적 상실과 고전적 미래를 다루는 대하소설의 영상화에 최적화된 인물인 것만 같다.
돌이켜보면 드니 빌뇌브의 영화적 여정 전체가 <듄>의 영화화를 향해온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을린 사랑>부터 <컨택트>까지 그는 매 작품마다 지성이 있는 기계 혹은 외계 생명체와의 매혹적 조우, 극단주의 세력이 포진한 ‘남부’와 대립하는 이방인, 맹목적 신앙의 위험성 등의 모티브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은 그 너머에 남는다. 일관된 취향으로 일군 압도적 영상미 외에 <듄> 시리즈의 진짜 성취는 무엇일까. <듄>이 비판받는 여러 지점을 살펴보다 보면 이 시리즈의 진짜 문제는 해야 하는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질량 자체가 작다는 데 있는 듯하다.
60년 전 기념비적 SF 소설 <듄>을 쓴 작가 프랭크 허버트는 이 소설이 그 무엇보다도 ‘영웅적 메시아의 환상을 경계하라’는 메시지에 충실하다고 강조했다. 모험극이 내재한 오락성 때문에 주제의식을 흐리고 싶지 않았던 허버트는 일반적인 소설 작법상 권유되지 않을 법한 선택도 수차례 감행했는데, 예를 들면 하코넨이 아트레이데스를 습격한 밤의 폭력적인 면면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음 날 아침 폴의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묘사하는 식이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습격은 드니 빌뇌브가 다시 빚은 <듄> 1편에서 가장 아이코닉하고 화려한 액션 씬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허버트가 경계한 대상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세기 전에 쓰인 소설의 제국주의적, 여성혐오적, 인종주의적 묘사가 돌출할 때마다 현대의 관객은 불가피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허버트는 커밍아웃 후 동성혼 합법화 운동에 투신한 차남을 영영 내친 아버지였고, 공화당 인사들의 연설문을 써주는 열혈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듄> 시리즈를 통틀어 유일한 게이 캐릭터인 하코넨 남작의 혐오스러운 성정과 외모는 허버트의 호모포비아를 방증한다.
20세기엔 자연스러웠으나 21세기 윤리와는 화합할 수 없는 여러 아이디어를 살리기 위해 페미니스트 드니 빌뇌브는 ‘확장적’ 각색을 시도했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프레멘 카인즈 박사 등 몇몇 조연의 성별을 뒤집거나 극 진행을 소심하게나마 바꾼 것은 이 노력의 산물로 보인다.
원작에서 폴의 유일한 사랑이 되는 것에 그쳤을 뿐 자신만의 사상과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프레멘 챠니의 변화는 특히 눈에 띈다. 그는 자기 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군으로 재탄생하고, 같은 프레멘 전사 중 광신도를 상징하는 스틸가의 대립항으로서 폴의 신격화를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관객이 이입할 유일한 지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파트 2의 결말에서 챠니는 결국 모래벌레를 타고 황제가 될 폴의 곁을 떠나기까지 한다. 그가 폴의 아이들을 낳다가 죽는 원작의 운명에서 벗어날지는 남은 이야기 동안 지켜봐야 할 테지만, 일단 드니 빌뇌브의 용감한 재해석이 일보 전진을 이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초인적 집단 베네 게세리트의 존재는 오히려 21세기 기술을 빌어 더 공포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려졌다. 세포 단위로 생명 활동을 조절하며 자기가 낳을 아이의 성별을 결정할 수도 있는 이 여성들은, 재생산 통제와 수명 연장이라는 인류 최후의 과제에 대한 해답을 가졌으므로 인간보다는 비정하고 계획적인 반인반신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파의 믿음인 우생학적 혈통주의를 따라 스스로의 몸을 ‘교배’의 수단으로 활용할 뿐 직접 은하를 통치하려는 욕심을 절대 품지 않는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한 순간에 도래할 절대적 지도자 남성 ‘퀴사츠 해더락’을 위해 준비된 일이기 때문이다.
폴의 능력 대부분이 베네 게세리트인 어머니 제시카에게서 승계됐으며 살해당한 아버지 레토 공작이 그에게 물려준 것이라곤 온화한 성품과 가문의 이름뿐임을 다시 생각하다 보면 현대의 관객은 당연히 의문을 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왜 1만 년 후에도 여성의 자리는 아직도 신비로운 뒷방에 머물러 있는가?
다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시리즈에서는 원작을 창조적으로 거스를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감지되는 것은 1960년대의 백인 남성 작가가 만들어준 세계를 최대한 충실하고 정교하게 답습하려는 또다른 백인 남성의 열망이다. 새로이 쓰인 이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너무 고결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백인 남성 메시아에 대한 경고조차 많은 이들의 귀에 가닿지 않는다. 탁월한 시네아스트인 드니 빌뇌브는 훌륭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청소년 시절 매료됐던 이야기로부터 객관적 거리감을 두는 일에는 상당 부분 실패했거나, 혹은, 애초에 거리를 둘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