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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r 24. 2024

<패스트 라이브즈>, 저기 먼 곳에서 야 라고 불렀다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다. 서사적 서정성에 총력을 다한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희한한 방식으로 서구권 영어 네이티브 관객들의 텃세랄까 재수 없는 수용자로서의 자세를 간접체험하게 해주는 영화다. 그레타 리와 유태오의 서투른 한국 말씨를 영화적 허용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해 분투했을 배우들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원어민 입장에선 억양과 발성이 묘한 모국어를 두 시간 동안 듣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힘겨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략과 침묵으로 열 줄의 대사를 대신하는 셀린 송의 선택에는 어쩐지 본능적이랄까 감각적인 그이의 관계의 미학이 엿보인다. 아시안 이민자 출신 감독들이 보여온 90년대 홍콩 영화나 대만 영화를 향한 강한 애착도 감지되는 듯하다. 그 덕에 영화보단 이 영화를 만든 그 사람에 대한 흥미가 훅 일었긴 한데, 글쎄 아무리 봐도 이 영화가 서구권에서 그토록 극찬받고 수 차례 노미되었던 건 아무래도 ‘한국계 미국인의’ 로맨스이기 때문 아닐까 싶은 생각(어차피 그이들은 이게 이상한 한국어인지 아닌지도 모르니까).



블랙팬서 시리즈가 아프리칸 아메리칸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공동을 메우기 위해 본토 아프리카의 허구적 국가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민 2세대인 감독이 그려낸 한국은 어쩐지 진짜 나라가 아니라 일종의 극장 무대 같다. 노라가 연극 시나리오를 주로 쓰는 극작가인 것, 이들이 찾아간 뉴욕의 여러 장소 - 특히 회전목마 앞에서 노니는 이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다정한 커플인 것은, 차라리 부자연스러움을 통해 ‘극 무대로서의’ 영화적 시공간성을 대놓고 강조하려는 영리한 연출의 일환 아닐까.


전생이나 인연에 대한 아이디어 자체가 (old fashioned 한 것을 넘어) 아주 신중히 다뤄야 할 클리셰 중의 클리셰란 사실을 셀린 송이 과연 몰랐을까? 그가 소재 자체의 구태의연함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기를 택한 이유를 계속해서 그의 배경에서 찾게 된다. 영화감독 송능한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 셀린은 나영처럼 12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주했고, 대학에서부터 정통 극 영화 연출의 전철을 밟았고 지금은 같은 제작자인 저스틴 커리스케츠와 결혼해 살고 있다.

감독의 개인적 배경을 알고 나면 노라는 셀린의 잃어버린 유년기, 잃어버린 서울에 관한 위무와 봉합을 상징하는 자전적 캐릭터가 확실해 보인다. 마치 앤소니 심의 <라이스보이 슬립스>처럼. 문제는 연출자와 캐릭터 간의 거리감이 지나치게 가깝고 또 애틋한 데에 비해 관객에게 설명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엉뚱하게 노라의 남편 아서에 이입해서 “노라도 해성도 이해되지 않고 아서가 생불”이라는 평이 가장 먼저 튀어나오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불충분한 이입의 지대가 야기한 혼란 때문은 아닐까.

​​


외려 유예된/취소된 로맨스의 안타까운 서정성만큼이나 노라가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작가 공동체 레지던스라는 특정한 공간이 궁금해진다. <어파이어>의 별장과 <강변의 무코리타>의 빌라, <물안에서>의 제주 집 그리고 <추락의 해부>의 산속 별장. 글을 쓰기 위해 혹은 도피하기 위해 찾아간 그 ‘작가들의 집’을 연달아 몇 편째 보고 있다 보니 과연 노라와 아서는 거기서 어떤 (키스 이상의) 역사를 겪었을지 알고 싶어지고…


분명 해성은 매력적인 사람, 노라는 그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힘주어 쓴 대사 “와, 너다”도 그저 그랬고, 해성이 나영이를 “야” 하고 부르자마자 24년 전의 계단으로 둘 다 빨려 들어갔다 다시 현실로 복귀한 그 한순간이 좋았을 뿐 마지막 2분의 끈질긴 응시나 그 후의 울음에는 슬프게도 같이 울어줄 수가 없었다네요.



덧. 나영의 남편 아서에 필요 이상으로 이입해서 아서가 진주인공이고 생불이라는 평이 그 무엇보다 먼저 나오는 사람들은 (뭐 자기 딴엔 나름의 도덕이 있겠지만) 그이의 영화 취향이 얼마나 고상하고 대단하든 간에 별로 섞이고 싶지는 않은 류. 옛날 <건축학개론>이나 <500일의 썸머> 시절 썅년 패기 스포츠에 왠지 열심히 동참하셨을 것 같고… 네… 그런 감성과는 영원히 안 맞을 것 같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단정적으로 굴 수 없는, 밉지만 이해되고 사랑하지만 이해 안 되는 그런 일이 정말 너무 많이 일어나지 않나. 제 생각엔 아서가 드물게 성숙한 남자인 덕에 피곤하고 질척이는 곁다리 서사가 생성되지 않아 다행일 뿐이지 노라와 해성이 유별나게 이기적인 사람들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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