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대체로 발명되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여운 벨라 백스터의 경우에, 아마도 그는 누군가의 피조물로써 이미 다 만들어지고 운명 지어진 세계에 후행하는 존재인 자신을 계속해 감각하고 모든 것을 새로이 발견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삐걱대고 춤추고 타자를 때려눕히며, 진보하고 발전하는 걸음걸음마다 이미 지어진 세계를 밟아나가고 관습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키워가면서.
벨라가 세상을 배워나갈 때 그 '세상'이 볼록하게 어안 렌즈로 보는 것처럼 그려진단 점은 바로 그래서 흥미롭다. 벨라가 가출해 메트로폴리탄이 되어가며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막간마다 기이한 해양 생물을 타거나 물속에서 함께 노니는 이미지가 재현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비슷한 시기 개봉한 사카모토 준지의 <오키쿠와 세계>에서도 역시 에도 시대 끝물의 젊은이들이 이제 막 태동하는 '세계'에 비로소 뛰어드는데, 결말부의 넓은 숲이 볼록한 구체형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세상이 인간의 정신적 문화적 지연을 초래할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로 발전할 때 혹은 그보다 더 빨리 무너질 때 무력하고 가여운 인간들은 언제나 허둥댄다. 산업혁명이나 전쟁, 역병의 후세대는 언제나 스스로의 나약한 동물성을 가장 절실히 자각하며 허무주의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쓸모를 의심하고 스스로가 말 못 하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지 열띠게 고뇌하던 시대.
영화 <가여운 것들>은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아간 1930년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태생의 작가가 2차 세계대전을 위시한 숱한 전쟁과 그 불완전한 복구를 지켜본 이후, 제국주의의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던 19세기말 영국을 샅샅이 해부하고 뒤집어가며 나름의 '우리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쓴 소설에 기반한다.
산업혁명과 대항해시대 이후의 영국 사회에 배양한 경계인적,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적 감성에 산아제한주의의 아이디어를 덧댄, 이 전형적으로 계몽주의적인 소설은 비시와 고드윈이란 작중 인물의 이름 차용부터 위대한 메리 셸리의 오마주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벨라뿐 아니라 여성 존재 자체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기를 기대받고, 신체를 복잡다단하게 부위별로 나누고 때론 재구성해 타인의 욕망에 부응하고, 생애주기 내내 혐오되고 숭배받는 존재들 -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직조한 프랑켄슈타인-여성 인물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현대극에서나 시대극에서나 늘 비가시화된 계급, 전체주의적 체제의 부동성에 비판적 질문을 던져온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과연 이 서사를 가져다쓰면서 자기 특기만큼이나 여성/성을 잘 다루었는지, 이 영화를 과연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작가주의 감독 중 그보다 나은 적임자를 곧바로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조금 사족을 달자면) 이제는 소위 '고상한' 영화들이 어떤 것인지, 장르적 재미를 기대할 수 있는 감독은 누구누구인지 따위를 알게 되면서 내 선택도 조금.. 예상 가능해지는 바람에 애착이 다소 흐려지긴 했지만. 영화를 마악 많이 보기 시작하던 한 7년 전쯤에 요르고스 란티모스란 내게 아이돌이나 다름없었다. 영화 리뷰 블로그의 거의 첫 글 중 하나는 그의 <킬링 디어> 리뷰인데 지금 읽으면 민망하리만치 뻔한 소리의 반복일 것이라 지워버리고 싶겠지만... 어쨌든 켄 로치나 요르고스 란티모스, 드니 빌뇌브나 올리비에 아사야스, 마틴 맥도나처럼 영화 취미의 첫 발을 떼게 해준 동시대 감독들에겐 여전히 감사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뭔가 배설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글 쓰고 싶게 해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화에선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소설에서 떼어내 버린 것과 한층 더 강조한 것, 영화화돼서 더 좋았던 것과 역시 실망스러웠던 것이 아주 뚜렷이 나뉘어서 보기에 더 즐거웠다. 그래서 영화 <가여운 것들> 리뷰는 책 <가여운 것들>과의 비교를 빼놓을 수 없겠다.
책에선 가출한 벨라의 편지가 던컨 웨더번의 편지보다 늦게 도착해 같은 여행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 판본이 생성된다. 또 이 모든 성장, 사랑, 혼돈을 지켜본(봤다고 주장하는) 아치볼드(영화 속 맥스) 맥캔들리스의 길고 긴 서술이 다 끝난 후에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벨라 벡스터의 서문이 뒤에 실린다. 벨라와 던컨은 함께 겪은 상황을 너무나도 다르게 해석하고 있고, 벨라와 아치 사이에는 치열한 진실 공방이 있다. 영화의 벨라는 맥스의 사랑과 제 사랑이 제법 합이 잘 맞는 '실리적 사랑'의 계약 관계라고 정리했지만, 원작의 벨라는 아예 아치의 고백이 구구절절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독자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는 (<추락의 해부>를 어쩔 수 없이 연상시키는) 라쇼몽적 게임에 가깝다.
만약 아치의 말이 맞다면 - 벨라의 말과 달리 - 고드윈 백스터는 벨라를 만들었고, 벨라를 성애적으로 욕망하고 사랑했고, 벨라가 아치 자신을 사랑하고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굉장히 낙심했다. 벨라와 아치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벨라의 냉철하고도 아치를 전혀 존경하지 않는 게 잘 보이는 '서문'에 따르면, 고드윈 벡터는 벨라 벡스터의 구원자였고, 빈민가에서의 불행한 유년기 후 폭력적인 아버지가 억지로 주선해준 상향혼을 통해 상류 사회에 원치않게 진입했는데 곧바로 남편에게서 성적 감정적 학대를 당한 불쌍한 벨라 벡스터는 환자 취급받다가 스코틀랜드의 의사 고드윈을 만나 곧 그에게로 도망쳤다.
더욱이 놀라운 건 벨라가 평생 사랑한 남자는 고드윈 하나뿐이었고, 고드윈은 아치가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혐오스러운 외모를 가졌거나 고립된 사람이 아니었단 것. 반전 다음 이어지는 건 벨라 벡스터가 아치의 죽음 이후 어떻게 반출생주의 혹은 맬서스주의 서프러제트로 거듭나 여생을 운동에 바쳤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화자 삼은 학자이자 완전한 관찰자인 남성은 자신이 발견한 이 저술을 두고 최종적으로 아치의 편을 들어주기를 선택하면서 (당연하게도, 남자니까) 벨라-빅토리아의 반론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진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매우 불안정한 여성의 편지"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래서 화자인 그 남자가 한 여성의 빛나는 지성과 강경한 투쟁을 진짜라고 믿기보단, 차라리 '남자가 창조한' 시체 조각과 뇌의 조합으로서 우연찮게 자아를 가지게 됐을 뿐인 약간 정신 나간 인형 취급하는 게 더 마음 편한 인물이란 사실까지 앨러스데어 그레이는 영리하게 까발린다.
인간 대 인간으로 누가 더 우월하고 우아한 삶의 방식을 택했는지 못 본체 하기. 흐린 눈으로 피해 가고 무조건 남자가 이겼다고 생각되는 판례만 자기 마음속에 집어넣는 확증편향. 마녀 만들기. 인형 만들기. 썅년 만들기. 똑똑하고 유능하고 야망 있는 여자를 남자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년, 남자 마음도 몰라주는 못된 년, 불안정하고 히스테릭한 년으로 만들기.
아치볼드가 직접 지은 '재미없는' 소제목을 대체하기 위해 창작한 이 화자의 발상이 '고드윈 백스터 만들기', '벨라 백스터 만들기', '미치광이 만들기'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제목들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상물이 아니라 제목을 지은 사람의 편협함과 사유 부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 소제를 짓고 매우 뿌듯해했지만 사실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입장에서 이것은 멀쩡한 타인의 생을 편견 가득한 시선에 따라 재조합하고 재정의하기 좋아하는,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자가 그의 남편과 스승보다 비교도 못하게 똑똑할 수 있단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남자에 대한 조소다.
이런 게 바로... 남성 지식인 집단 내부의 자의식 과잉적 오류를 비판하고 싶어한 남성 작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유머 아닐지. 그래서 영화에서 '00 만들기'에 대한 명시적 언급 없이 벨라의 발길이 닿은 도시들만을 소제로 남긴 건 안전하고도 재미없는 선택이었다고 느낀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여성, 선량하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성이라면 의무로서 행하는 것 외에 성적인 접촉을 누리기를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소. 심지어 이교도 철학자들도 남자들은 정력적인 파종자이며 여자들은 평온한 밭이라는 걸 알았지요.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에서 루크레티우스는 방탕한 여성들만이 엉덩이를 씰룩댄다고 말합니다.“
“그런 신념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위배되고, 대부분의 인간 경험에도 반하오.” 백스터가 말했다.
“대부분의 인간 경험에요? 왜 안 그렇겠소!” 프리켓이 외쳤다. “나는 교양 있는 여성, 존경할 만한 여성들에 대해 말하는 거요. 저속한 서민 계급 여성들이 아니라.”
백스터가 벨라에게 말했다. “이 기이한 관념을 최초로 기록한 사람들은, 여성이 오직 남자를 생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던 아테네의 동성애자들이었어. 그다음엔 기독교 독신주의 성직자들이 그 관념을 받아들였지. 그들은 성적 쾌락이 모든 죄의 근원이며, 여자가 그 죄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어째서 그런 발상이 지금 영국에 널리 퍼져 있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남학생 기숙학교의 규모와 수의 증가로 인해 여성 현실에 전혀 문외한인 전문가 계층이 육성되었는지도 모르지.”
이런 블랙 유머도 좋았는데 고학력 소설가이자 시민사회 일원으로서의 앨러스데어 그레이가 얼마나 시니컬한 메타 인지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
다만 영화는 아치의 재창조 격인 맥스라는 남자 - 실용적인 사랑을 하고, 벨라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고드윈의 자존심 부리는 친구가 아니라 교수를 모시는 겸손한 '제자' -를 새로이 만들었다. 이 선택이 아치와 블레싱턴 장군, 던컨 웨더번 등등이 표상하는 제국주의 시대 엘리트 남성 일반에 대한 신랄한 짜증을 다소 뭉개버린 듯해 아쉽긴 하다. 멍청하고 한심한 남자들 비웃는 게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제2목적인 것 같을 정도로 열심이었는데 영화에선 아무래도 맥스와 고드윈 그리고 해리 애스틀리 등등을 향한 좀 더 옹호적이고 따스한 이해의 시선이 보인다.
동시에 원작에선 아주 살짝 벨라가 정말 인형/시신이었진 않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구석도 있다. 의학박사 빅토리아가 직접 저술한 서문에서도 그가 벨라처럼 유의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아치의 서술과 벨라의 진실이 다소 혼란스럽게 뒤섞이며 경계를 흐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치의 진실과 벨라의 진실 중 하나를 고르더라도 모두 100% 진실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둘의 이야기가 '어떻게 다른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가 어떻게 여생을 살아갔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의도가 여기 숨어있다고 믿는다.
원작의 화자가 찾아온 사료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는 빅토리아-벨라의 말년은 이랬다.
1892년과 1898년 사이에, 빅토리아 박사는 두 살 터울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매번 출산 이삼일 전까지 진료소 일을 계속했고, 출산 후엔 곧바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진료하는 가난한 여성들은 다들 그렇게 해야만 해요. 그들에겐 와식 분만을 할 여유가 없죠. 그리고 나는 그들 대부분보다는 운이 좋아요. 내 남편이 아내 역할을 훌륭히 하거든요.”
1899년에 페이비언 협회가 공중보건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와식 분만에 반대하여」라고 불린 그 소책자에 따르면, 많은 의사들이 환자들을 눕히길 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환자들이 아닌 의사들에게 더 많은 힘을 쥐여 주기 때문이다.
와식분만은 신체의 내적 작용들이 오직 의사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성한 수수께끼들이라서, 선량한 환자라면 반드시 그에 대해 의문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함을 상정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제와 정치인들이 의문 없는 믿음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학 교육을 받은 우리들이 왜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봉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고기관을 제거하고 우리 앞에 엎드려 굴복하기를 바라야 하는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그녀는 도대체 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가장 산업화되었으므로 가장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던 국가들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에다 가장 잔인한 전쟁을 치렀는가에 대해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생각했다.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어째서 한 명씩 따로 보면 피에 굶주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은(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남자들이 그들에게 그렇듯 자살에 가까울 정도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라 명령하는 정부에 복종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정신이상의 전염병에 걸리기 쉽다는 톨스토이의 견해를 인정했다. 마치 수천 명의 프랑스인이, 설사 그들이 러시아를 점령한다 해도 그들의 나라가 더 부유해지지는 않았을 것임에도, 나폴레옹을 따라 러시아로 들어가 그곳에서 죽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사로서 그녀는 원인이 밝혀진다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과밀 지역에서 생활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과밀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호전성에 전염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계 대전에서 싸우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적어도 4분의 1은 널찍한 집을 가진 부유층이었고, 그 대학살을 명령하고 지휘한 거의 모든 사람이 이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세계 대전은 영국이 프랑스, 스페인, 홀란드, 프랑스, 미국, 그리고 프랑스와 벌인 전쟁의 원인과 동일한 국가적 상업적 경쟁 때문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전쟁을 지지하고 그 전장에 나가 싸운 사람들은 “자멸적 복종의 전염병”에 굴복한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왜냐하면 부모의 잘못된 육아가 그들 대부분에게 자신들의 삶이 무가치하다는 믿음을 마음 깊이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검사는 인명 살해 종교에 입문하는 세례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종교에서 최고의 군인은 그 자신의 신체를 가장 둔감한 기계로 간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심지어 그것은 자기 자신의 기계가 아니라, 원격조종기에 의해 조종되는 기계였다. 내 둘째와 막내아들은 자진해서 그런 기계가 되었고,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짓이기고 으깨어 진창으로 만드는 걸 용인했다. (...)
우리 아이들은 모두 평화로운 스코틀랜드의 전문직 공무원이 되어, 가장 인도적이고 현대적인 발상들을 이용하여 우리가 20세기의 큰 과제로 알고 있는 것,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청결한 좋은 집을 갖고 쓸모 있는 일을 하며 괜찮은 보수를 받는 영국을 만드는 일에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내 세 아들은 그 즉시 여우사냥을 즐기는 잉글랜드 토리당원의 아들인 양 행동했다. 내가 이것을 사악한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느꼈을까? 나는 인간 본성이나 인간 남성의 본래적 타락에서 답을 구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나는 그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군국주의적 역사를 탓할 수도 없다. 그들이 집에서 읽고 배운 것들이 분명 그것을 상쇄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인생에서 최초 6년 혹은 7년 동안, 나는 이 아이들에 대해 완전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겐 많은 돈과 다정한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1914~1918년 전쟁의 자기비하 전염병에 저항할 자존감을 주지 못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만약 내가 나 자신에서 그 질병의 뿌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을 테지.'
"의학박사 빅토리아 맥캔들리스는 노동계급의 부모들이 제한된 형태의 출산 파업을 감행함으로써 그들 자녀들이 가진 노동력의 가치를 높이기를 원한다. 공장이 문을 닫고 임금이 줄어든 이 해에, 곳곳에서 노동계급 운동이 일어나 노동 할당제로 실업을 척결하도록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해에, 훌륭한 동지에게서 나온 그런 요구는 물을 흐리는 경솔한 처사이다."
"빅 박사의 “시트를 사이에 둔 성관계” 방식이 인기를 끈다면(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 그녀가 그것을 선전하는 데 꽤 많은 돈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몇 년 안에 영국의 모든 징병 연령 남성은 가톨릭 아일랜드인보다 수적으로 열세가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문명 세계에서 유행이 된다면, 우리는 볼셰비키, 중국인, 흑인에게 압도당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사악한 인물들은 사회주의를 가장하여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불만과 악습을 퍼뜨리기 위해 돈주머니를 사용하는 불로소득자들이다.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볼셰비키 의사인 빅토리아 맥캔들리스가 지난 30년 동안 비밀리에 그녀가 현재 공개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글래스고 빈민가에 위치한 그녀의 소위 “자선” 진료소에서 그녀는 수천 명의 가난한 여성에게 자연과 기독교 신앙과 이 땅의 법을 거역하도록 가르쳤다. 우리가 지금 거론하는 것은 “시트를 사이에 둔 성관계”라는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발상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바로 낙태 말이다. 결국 그것이 『사랑의 경제』의 귀결점이다."
벨라-빅토리아는 그러니까, 자선 진료소에서 수천 명의 가난한 여성에게 자연과 기독교 신앙과 이 땅의 법을 거역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구원자 - 연대자 여성으로 삶을 마감한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고드윈이 그를 만들었든 살렸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벨라가 무엇이 되어 살아갔는지가 훨씬 중요한 문제다. 벨라는 유형화되지 않는 삶, 어딘가에 갇히지 않는 삶을 그 누구보다 추구했을 테지만 분명히 '볼셰비키 의사'를 멸칭으로 사용한 사람들의 악의에도 호탕하게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는 어차피 '무엇을 하느냐'가 '무엇으로 규정되고 무엇으로 불리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작을 영화화하며 바뀐 것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벨라가 여행 중 만난 친구들, 해리 애스틀리와 노부인 마사의 인종/성별이 원작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 영국계 미국 신사 해리 애스틀리는 흑인 배우 제러드 카마이클이 연기했다. 마사는 아마도 해리의 한시적 동행인 의사 후커 박사와 벨라의 첫 가정교사 맥테비시 양 등등을 섞어 만들지 않았나 싶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부유한 흑인 신사가 홀로 유람을 즐긴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데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so white한 영화를 만드는 전형적인 백인 남성 예술가가 되기는 싫었던지 아주 천연덕스럽게 (레게 장 페이지를 기용한 <브리저튼>처럼) 해리의 인종을 바꿔놨다.
특이한 노부인 마사도 <바비>의 루스/바바라 핸들러처럼 마치 벨라의 노년을 미리 엿보게 해준 것 같은 인물이라 좋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해리와 마사를 등장시키기 위해, 그들을 자연스럽게 이 시대극 속으로 녹이기 위해 근미래 스팀펑크 SF 같은 배경을 설정한 건 아닐까 싶었을 정도.
더해져서 좋았던 걸 딱 하나 꼽자면 단연 놀라운 배우 마크 러팔로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게 구현한 찌질이 변호사 던컨 웨더번이다. 던컨이 제멋대로 기괴하게 춤추는 벨라를 보고 수습하러 달려 나가는 부분이 가장 웃겼고 어느새 벨라한테 영혼까지 의지하게 돼서 울음 터트리는 너무 많은 순간들도 말도 안 되게 코믹했다. 이런 게 바로 영상화의 장점이구나 새삼 깨달았다.
정식 개봉보다 조금 이르게 씨네큐브에서 본 덕에 큰 관에서 마치 부산 영전 상영을 방불케 하는 열기를 경험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던컨이 담당한 유우머 대사마다 같이 꺽꺽대며 으하하 웃고 시끄럽게 박수도 쳤다. 아무도 남들에게 짜증내지 않았고 그냥 같이 웃으니까 더 눈물 나게 웃겼는데 이런 즐거운 일체감 느끼는 영화적 체험은 굉장히 드무니까(다같이 우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있지만). 큰 관을 꽉 채운 사람들과 대놓고 코미디도 아니고 사카즘적 대사로 다같이 웃는 건 한동안 없겠구나 싶었는데 굉장히 신났고 반가웠다. 그리고 어쩌면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 중에 가장 웃긴 영화로 기억될지도.
안타깝게도 그 외엔 영상화하며 안 더했으면 더 좋았을 것들이 훨씬 많았다. 너무 많고 불필요한 섹스 씬, 너무 긴 시간을 할애한 파리 매춘은 이미 각국 평단을 비롯해 일반 관람객들한테도 사이좋게 욕먹고 있지만. 나 역시 한 마디 얹어보자면 정말 뭘 위한 전시였는지 모르겠고 란티모스를 좀 다시 보게 될 정도로 실망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그전에도 여성 나체 이미지나 섹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감독이기는 했지만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그리고 <더 페이버릿>까지 그가 연출한 섹스란 다소... 기이하고 건조하고 무감정하고, 정말 생리적 욕구/서열 정리의 목적을 갖고 행해진 요식에 가깝게 느껴져서 그다지 착취적이거나 관음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 작에서는 벨라라는 여성의 섹슈얼한 아름다움이 강조되어야 했고(적어도 란티모스는 그렇다고 생각한 듯하고), 거기 발정하는 온갖 국적/계층/직군의 남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였다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종다양 별로인 섹스씬이 너무 많았다. 매춘 자체나 벨라가 실제로 당한 세세한 행위들이 문제적이기도 하지만, 글쎄 여성이 세상을 배우는 방법이 반드시 성적 감각적 도락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할까? 영화 <가여운 것들>은 원작보다 타자(주로 해리 애스틀리)와의 충돌을 통한 지적 교환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대신 스스로 독서하며 성장하는 벨라를 보여주면서 지적 성장에 대한 묘사를 거의 대부분 덜어내는데, 이 빈 부분을 벨라의 성감에 대한 집착에서 찾는다. 원작 역시 이 비난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적어도 텍스트와 이미지의 차이를 확실히 알아야 하지 않나. 심지어 영화 러닝타임 비중상 이 매춘 파트는 책보다 훨씬 길어졌으며... 벨라/여성들의 성욕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란티모스가 대책없이 엠마 스톤의 나신 이미지에 너무 많은 시간과 시선을 할애했고 그에 의존했단 뜻이다.
“존경할 만한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애인과 길고 멋진 밀월여행을 즐기다니, 정말이지 탁월한 판단이야.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자기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아야 할지 전혀 모른 채 결혼생활에 들어가거든. 하지만 이 웨더번이라는 남자는 누가 봐도 단물 빠진 껌이잖아요? 지금 자기가 즐기는 다양한 경험들이 자기가 미래의 남편에게 훨씬 더 나은 아내가 되는 밑바탕이 될걸.”
그녀는 이 호텔이 런던 사람들이 매음굴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시설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녀의 고객들은 한 시간 이하의 시한 동안 생판 모르는 사람과 결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남자들이었어요. 영국에서는 매춘이 불법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질병이 없고 똑똑한 여자라면 누구나 그것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취득할 수 있었고, 그녀의 호텔처럼 허가받은 업소에서 일을 찾을 수 있었어요.
원작에서부터 이런 적극적 성노동에 대한 옹호에 잠시 멈칫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최소한 원작에서는 이 단락 이후 단 몇 쪽만에 모든 게 마무리된다. 여행은 끝나고 던컨은 벨라에 의해 집으로 반쯤 강제 송환되어 예의 편지를 고드윈과 아치에게 보낸다. 그동안 벨라가 '배우는' 것들은 영화에서처럼 수많은 단역 조연 성매수 남성들을 동원하지 않고도 충분히 다 설명된다. 벨라는 성병 검사 중 제대로 소독하지 않은 의료 기구를 쓰는 엉터리 의사에게 분노해 따졌다가 그간 번 돈을 모두 잃고 포주와 작별하며, 고드윈의 지인인 프랑스인 의사에게 돈을 빌려 집으로 돌아온다.
말하자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지난 작들이 극단적으로 억압된 세계에서 통제를 깨고 나오려는 개개인의 욕구 분출을 지향하며 하나의 수단으로 성적 교합을 택했을 뿐이라면, - 바로 그가 그런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실제로 교합(wed)이란 단어를 콕 집어 사용한 세심한 작가 앨러스데어 그레이와 꼭 들어맞는 감독이리라 기대했는데 - 이번 <가여운 것들>은 섹스라는 이미지적 목적이 선행했고 그걸 위해 벨라의 열려 있는 모험을 잔뜩 전시한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리고 만약 영상도 소설처럼 전복으로서의 성노동이란 관점에서 풀어내려 했다고 핑계를 댄다면... 난 남감독이 여성학 박사쯤 따기 전에는 아니 박사 단 후에도 그런 소재 감히 먼저 건들면 안 된다고 굳게 믿음... 씨네21 김예솔비 평론가가 '통제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반드시 모험인가'라는 한줄평을 남겼던데 이것이 어느 정도 벨라의 성적 모험이 강조된 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느껴 공감했다.
펠리시티의 탄생 역시 충격적이다. 펠리시티라는 제2의 괴물 여성은 원작에서 등장도 안 한 존재인데 대체 영화에선 뭘 위해 창조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알쏭달쏭하다. 딸이자 약혼자인 여자 없어지니까 다른 아기 여자를 만들어서 데려오는 거 누가 봐도 너무 이상한... 너무 남자다운 짓거리를 한 건데 제작진이 맥스와 고드윈에게 이미 각색을 통해 따스한 애정을 증명한 마당에 구태여 그 둘의 무한한 이기심을 다시 강조하려고 든 건 아닌 것 같다. 그럼 정말로 단순히 벨라라는 유일무이한 존재의 특별함을 펠리시티와의 비교를 통해 강조하려고 한 걸까? 아니면 영화 외적으로 제작진이 마가렛 퀄리라는 걸출한 배우에 대한 욕심을 좀 부렸을까?
결말에서 벨라가 맥스와 단둘이 부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프림 부인, 투아넷, (무언가가 된..) 전남편에다 펠리시티까지 데리고 대안적인 대가족을 이루긴 했지만 처음부터 그 아름다운 그림을 위해 펠리시티를 만든 건 아닐 것 같아 의심스럽다. 그래도 어쨌든 언젠가 프림 부인을 '대체'할 하녀가 필요해질 때가 오긴 할 것이고 그때에 펠리시티는 요긴한 '쓰임'을 갖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결말을 상상하든 이상한 흐름이지만.
고드윈의 아버지 콜린 경이 고드윈을 심하게 학대했다는 설정도 책에선 나오지 않는다. 원작 소설에선 고드윈이 아치에게 '콜린 경과 그 간호사들에게서 필요한 모든 보살핌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버지 콜린 경은 다소 특이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사생아 고드윈에게 최상의 교육과 환경을 제공하려 노력했고 학대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가정부 프림(책 중 '딘위디') 부인이 콜린 경의 능력 있는 간호사였단 점도 벨라와 고드윈의 진술에서 교차 검증된다.
벨라는 고드윈이 자기 신분의 보호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숨겨야 할 천출 어머니에게 서슴없이 '어머니'라고 부르고 손님들에게도 어머니를 곧잘 소개하는 좋은 아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기에 책에서 아치가 '벨라처럼 고드윈도 (콜린 경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은근하게 암시한 부분은 벨라의 신랄한 공격을 받는다. 서문에서 벨라는 아치의 '설정'을 두고 이렇게 평한다.
갓은 대학 해부학과에서 기존 강사가 병가를 낼 때 대신 시범을 보였고, 맥캔들리스는 그때 처음 그를 만났어. 체구가 작고, 볼품없는 맥캔들리스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갓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어. 그는 물론 나도 사랑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가 나를 갓의 여성적인 부분으로, 그가 껴안고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갓은 그의 생애 최초의 위대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응답받지 못했지. 내가 파크 서커스에 오기 훨씬 전에 맥캔들리스는 갓이 일요일마다 자기 개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경로를 염탐해서 알아냈고, 그 경로에서 계속 그와 마주쳐 동행했다. 갓은 그 누구에게도 몰인정하게 굴 수 없는 사람이었어.
불행하게도, 나의 아치는 자기가 사랑했던 유일한 두 사람이자 자신을 용인해 준 유일한 두 사람을 질투했어. 그는 갓이 유명한 아버지와 다정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두었기에 질투했어. 그는 나의 부유한 아버지, 수녀원 교육, 그리고 유명한 첫 남편을 몹시 싫어했고, 나의 우월한 사회적 매력에 분개했어. 무엇보다도 그는 갓이 나와 어울리고 나를 보살펴 주는 것과 갓에 대한 내 사랑의 힘을 질투했으며, 우리가 그에게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이 (내 쪽에서는) 감각적인 도락이 뒤섞인 친절한 호의라는 사실을 싫어했지.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몇 달 동안 자신과 갓과 내가 완전히 평등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스스로를 달랬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린 시절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직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갓 또한 어린 시절이 없었음을 암시하는 책을 썼어. 콜린 경이 프랑켄슈타인의 방식대로 갓을 제작했기 때문에, 갓은 항상 아치가 그를 알았던 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내가 정신적으로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어린 딸이었다고 암시함으로써 내게서 어린 시절과 학교 교육을 빼앗았어. 우리 모두에게 이런 동등한 박탈을 날조하고 나서야 그는 내가 어떻게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고드윈이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는지를 수월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아치볼드는 고드윈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고립을 자처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괴물인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공들여 묘사했지만, 벨라의 이야기 속 고드윈은 누구나 부드러운 연민 섞인 경애를 품게 할 만한 남자다. 고드윈에 대한 부부의 엇나간 진술을 피해가고 또 맥스(아치)를 적절히 덜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두 판본을 섞고 벨라의 묘사를 좀 더 믿기로 결정한 것 같다.
그래서 윌렘 데포가 연기한 고드윈 백스터는 왼쪽 얼굴에 십자가 모양 흉터를 갖고 이리저리 봉합된 자국이 있고 위액을 직접 만들어내 식사하는 괴물의 외면을 가졌되,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자애롭고 존경받을 만한 아버지이자 교수가 되어 부성애로 모든 가여운 존재를 품는 성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뻔한 대디 이슈 없이도 고드윈이란 양면적인 인물의 깊이를 드러낼 방법은 많을 텐데 싶어 이 역시 지루하고 안전한 헐리우드식 시나리오 공식을 따른 선택이라곤 생각하지만, 또 한 편으론 배우 윌렘 데포의 넓은 연기 폭에 대한 기대치란 영화 외적 사정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각색이었던 것도 같다.
(책에서는 아치가 고드윈이 벨라를 사랑해서 벨라가 사랑한 남자인 날 죽을 때까지 질투했다고 오백 페이지쯤 주절댄 다음에 곧바로 벨라가 내가 진짜 사랑한 건 고드윈뿐이었다고 못박아버리는 바람에... 던컨 웨더번 못지않은 아치의 하남자 면모가 더 도드라지는 재미가 엄청 크긴 했지만ㅋㅋ 그것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영화화했다면 뭔가... 영화계 거물 노인 백남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음)
소설 <가여운 것들>에서 빅토리아 해터슬리, 빅토리아 블레싱턴, 벨라 백스터, 벨라 맥캔들리스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만약 노동계급이 평화적 방법으로 전쟁을 중단시키고,
그런 다음 거대 산업 국가들의 도덕적, 실질적 통제력이 소유주들로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로 넘어간다면,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미래의 아이야,
네가 사는 세상은 더 건전하고, 더 행복한 곳이 될 거다.
행운을 빈다.
이토록 혁명가인 벨라. 그의 운동은 영화화를 거치며 흐릿해졌고, 용감한 복지가이자 (예비) 지식인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만족해야 했지만 어쨌든 엔딩의 정원을 바라보며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구축한 나름의 유토피아. 개조당해 더이상 인간이라 보기 힘든 전남편과 충실한 파트너인 맥스 빼곤 전원 여성인 아마조네스에서 그는 아버지를 편안히 보내드리고 그 집의 정당한 주인이 되어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 의학박사가 되는 것. 맥스만이 그 곁에 있는 것이 아니며 파리에서 동지이자 연인에 가깝게 지냈던 투와넷이 오히려 맥스보다 더 가깝게, 더 동등한 눈높이에서 벨라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 안정적인 구도가 그 셋의 폴리아모리적 관계를 짐작케 한다.
그러니 벨라는 원하던 것을 모두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무력하고 가냘프게 스러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달리 이 여자는 죽는 날까지 성장하고 연민하고 분노하며 나아갔을 것이다. “인간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어요?”란 질문을 누구에게나 공평히 던져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