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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총과 꿈과 벽과 춤

by 유해

어쩌면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을지 모른다. 시 쓰고 노래 만드는 일에 몰두하다가 이제는 똘똘한 34타입 입성을 바라며 투자의 행렬에 주저없이 끼어드는 친구가. 반자본 반빈곤 시위의 깃대를 들고 섰다가 이제는 사측 대리인이 되어 나도 노동자라고 토로하는 친구가. 페미니즘 필독서를 몇 권이고 선물하고 언젠가는 여자들끼리 같은 집에 살자고 말해줬다가 어느날 갑자기 청첩장을 건네주는 친구가.


혁명의 불길이 몇 차례나 지나간 시대, 자본은 교묘한 조종으로 실체를 숨긴 채 가장 친밀하고 깊은 자리마저 점하려 한다. 오랜 세월 벼려진 착취자의 꼼수는 친구의 가면을 쓰는 데까지 나아갔기에 어떤 이들은 치킨집에 둘러앉은 글로벌 대기업 총수들의 사진처럼 얕고 단순한 PR에도 기꺼이 열광한다. 가끔은 적이 누군지 모르고 싶어한다는 핑계로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 것만 같다. 가치와 사익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며 유치하고 뒤늦은 고민에 목매는 건 남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과거에 함께 희구했던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일 테다.


돈 버는 세계와 돈 벌지 않는 세계의 구분이 옳지 않음과 옳음의 구분에 정확히 대응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돈 잘 버는 똘똘한 근로자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무수한 옳음에 대한 포기가 필요하다. 직장에서 ‘우리’는 여전히 가장 래디컬한 축에 속한다. 약자성과 위계에 대한 둔함이 사회성의 척도가 되는 곳에서 입을 다물고 웃어주는 사교에 동참하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가끔은 너무 피로해서 거대하고 사악한 흐름에 아무 생각 없이 영영 몸을 맡겨버리고 싶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나오는 감탄의 첫마디가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인 사람들과는 앞으로 과연 무엇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예전엔 불편과 불결 없는 세상을 파훼하길 꿈꾸다가 지금은 일신의 편안함을 목표로 두게 된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너희 운동은 다 위선이었냐며 이죽대는 이들이 착각하듯 좋은 게 좋은 거라서 ‘변절’한 게 아니라, 살다보니 보이고 누리는 게 달라졌고, 최소 한도의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졌고, 뭔가를 책임질 나이가 되었단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퍼피디아의 신속한 변절에도 놀라지 않았고 실망하지 않았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야말로 단 한 번도 극점까지 다다라본 적 없는 사람만이 아무런 사유도 근거도 없이 게으르게 주워섬기는 말이라고 믿어 몹시 싫어하지만, 슬프게도 투항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기 마련이다.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빨리 지친다. 곧으면 부러지기 쉽다. 대의와 신념에 깊이 몰입할수록 믿음이 흔들렸을 때 크게 휘청인다. 임신한 퍼피디아가 기관총을 난사하는 아이코닉한 장면에서도 파트너 팻 칼훈은 ‘임산부라는 자각이 없어보인다’며 걱정할 뿐이지만, 퍼피디아를 더 오래 보아온 여자친구들은 조금 질린 얼굴로 <스카페이스>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한 희대의 기회주의자, 아마도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섹시한 배신자 이름을 댄다. “꼭 토니 몬타나 같네.” 과시적이고, 명망 높고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랐고, 자기애에 충실한 퍼피디아의 다음 행보에 대한 짐작은 그쯤에서 확신이 된다.

록조 대령과 처음 대면한 이민자 수용소에서 퍼피디아의 기세등등한 선언을 단번에 흔한 어린애 투정으로 만들어버리는 록조의 외마디 ‘귀엽군’에 퍼피디아가 얼마나 분노했을지를 이해한다. 결국 붙잡힌 퍼피디아를 휠체어에 태워 환호하며 셀카를 찍는 경찰들의 조롱에 퍼피디아의 얼굴은 빛을 잃는다. 그가 가장 미워했을 백인 남성 공권력이 끝의 끝까지 퍼피디아를 유린하고 수모를 주고 밀고자로 만든다. 명멸의 전 과정 중에 퍼피디아 자신에게 무엇보다 괴로운 건 더이상 혁명을 위해 나를 불지를 수 없다는 자각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 시작한 혁명이었는지 더이상 확신할 수 없다는 초조함도 있었을 테다.

아이를 낳자마자 육아에 푹 빠진 팻을 보며 퍼피디아는 기이한 고독 내지는 질투심을 (아마도 난생 처음) 경험하고, 동료 정글푸시에게 ‘그가 내게 관심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이 무슨 출타한 남편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순진한 주부 같은 말인가. 모성이나 일부일처제 따위야 가부장제 남성 권력의 같잖은 도구로 보고 무시하던 혁명가 흑인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류의 분노와 좌절은 그렇게 발화해버려서 멋없는 현실이 된다. 이 낯선 나약함을 회피하기 위해 퍼피디아는 집 밖의 싸움을 핑계 삼는다. 마치 남성 가부장처럼 괜히 팻의 섬세하고 가정적인 면을 매도하며 프렌치75의 핵심 간부로서의 명분과 권위, 불씨를 꺼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자기 확신까지 되살려보려다 은행에서 애꿎은 흑인 경비원을 쏴죽이고 마는 것이다.


모두를 이끄는 줄 알았으나, 실은 자기 자신조차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존재. 가장 부수고 싶어하던 이에게 동지를 팔아넘기고 제 한 몸 의탁한 어린애. 이토록 혼란스럽고 충동적이고 결함 많은 운동가를 당대에 곧바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혁명은 처음부터 고귀해서 혁명이 아니라, 마이너리티, 소수자, 피지배자, 인민 대중이 압박이 극에 달했을 때 모든 것을 파괴하고 리셋해버리자는 원초적 욕구에서 시작된다. 잘 쓴 선언문 몇 줄이 지금 여기의 폭정과 불평등에 지친 이들의 집단행동을 끌어낼 수는 있어도 그다음 행보를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격한 투정에 불과하다며 제대로 비평받지 못하던 것이 사후 의미화를 통해 제대로 된 혁명으로 옹립하기도 한다.

설사 퍼피디아가 (그 자신도 몰랐지만) 대의를 이루려는 열망보다, 투쟁하는 나 자신에 대한 도취로 그 모든 일을 꾸몄대도 어떤가. 그가 강자를 위한 법 주변의 모든 걸 폭파시키고 방화하고 전쟁을 예고한 덕분에 멕시코 국경의 이민자들은 해방되고, 어떤 의원은 겁을 먹고 임신중단 금지 법안 발의에서 슬쩍 빠져나갔을 것이다. 퍼피디아가 튼튼한 두 발로 피 흘리며 뛴 시절 덕에 그다음 운동의 가닥이 잡히고 하면 좋을 일과 해선 안 될 일의 법전이 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동료들이 다 죽고 나서도 퍼피디아의 딸을 구하러 온 디앤드라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



왜 하필 위대한 미국에서 가장 천시받는 인간 - 젊은 흑인 여성-이어야만 했을까? 왜 하필 그가 모두를 배신한 위선자가 되어 위선조차 떨지 않는 평범한 악인들에게 비웃음 받아야만 했을까? 수용소를 폭파하고 떠나는 첫 모험에서 ‘흑인 여자는 어떠냐’는 퍼피디아의 원색적 플러팅에 “난 흑인 여자 좋아해!”하고 소리지르는 팻을 보라. 얼빠진 디카프리오의 얼굴은 바로 전작 <플라워 킬링 문>에서 연기한 아메리칸 원주민의 찬탈자 백인 남편 어니스토를 떠올리게 한다. 또 퍼피디아가 말하고 숨 쉬고 웃고 마시고 움직이는 동작을 담아내는 카메라는 망원경을 들이대고 그 신체의 생기를 꼼꼼히 탐독하는 스티븐 록조의 시선, 말 그대로 메일 게이즈 그 자체를 대변한다.

그로써 흑인 여성의 섹슈얼리즘을 해방시키는 체하면서 다시금 일종의 요녀로 페티쉬화하는 이세벨 스테레오타입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PTA는 교란 자체를 긍정하는 자신만의 기조를 꾸준히 유지하려는 듯하다. 디앤드라가 애써 구해낸 윌라가 겨우 숨겨둔 스마트폰 하나로 자기 자신, 디앤드라, 용감한 비버 수녀회까지 모조리 발각당하게 만들 때도 그렇다. PTA는 다른 친구들이 비밀을 지키는 동안 젠더 경계에 선 논바이너리 친구 보보가 윌라를 고발하게 만드는 얄궂은 연출적 선택을 반복한다. 정의도 시간이 지나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맹목이 될 수 있고,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행동과 선한 행동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단 걸 알기에.


퍼피디아는 떠났고 정글푸시는 죽었다. 빌리 고트와 레이디 샴페인은 잡혀갔고 아마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동경과 애정이 실망과 냉소로, 다시 이해와 연민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세월이 지났다. 꼭 필요한 시절에 혁명분자들의 과격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나는 험한 세상에서 나를 잃어가며 돈 벌면서도 ‘안전하다’고 느낀다. 언제든 닻 내릴 항구를 가진 사람처럼 ‘돌아갈 곳’을 셈해보며 언젠가는 다음 싸움이 또 있을 거라고, 그때 다시 만나면 되는 거라고 애써 믿는다. 곱씹으면 거의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지만 단 하나 내려앉는 의문이 있다. 그들이 알려준 싸움 뒤켠에 남겨진 자의 휑한 마음은 누가 책임지지?



게토 팻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 혁명은 애초에 없었고 그는 마약하듯 남이 주입해 준 이상 - “Make it big, make it bright. Inspire me.” -에 따른 게 전부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래서 오늘 계획이 뭐야? 우린 뭘하면 되는 거야?”를 계속해서 물어봤던 팻은 누군가의 지도가 필요한 팔로워다. 백인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국가와 반체제 저항군이 난잡하게 교합할 때 팻과 같은 소시민은 그 사이에서 놀아난다. 그를 이끄는 퍼피디아가 사라지자 밥이 된 팻은 완전히 길을 잃는다.


기실 밥의 존재는 윌라가 납치됐다가 구출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거의 없애도 무방한 별도의 플롯 선에 존재한다. 그는 록조가 군인들을 끌고 온 수녀원에 거의 근접했다가도 사격에 실패해 금세 딸이 탄 차를 잃어버리고, 젊은 스케이트보더들의 파쿠르를 무거운 몸으로 허겁지겁 따라가다 나무에서 떨어지고 만다. 테이저건에 맞아 오 초만에 붙잡히는 늙은 밥, 셋 셀 테니 썩 뛰어내리란 세르지오의 격려에도 넷까지 뛰지 못하는 겁쟁이 밥이 아니라 다른 어른들과 윌라 그 자신이 윌라를 구한다. 밥은 언제나 한 발 늦게 도착해서 쑥대밭이 된 스티븐 록조의 차를 목격하거나 이미 스스로를 구출한 윌라를 데려올 뿐이다.


먼저 가족들에게 밥을 ‘백인 혁명가’라고 소개한 주짓수 사부 세르지오. 박탄 크로스의 남미계 이주민들을 그러모아 돌보는 정신적 지주인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방식의 운동에 투신했던 밥을 존중한다. 밥이 과거의 혁명 거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약과 술에 뇌를 곤죽으로 만든 루저임을 알고도 돕는 이는 세르지오뿐이다. 혼종적이고 일탈적인 애칭 “나쁜 옴브레”에게 어떤 미약한 희망을 걸고 몇 번이나 위험을 무릅쓴 그는 교란과 경계의 존재에 천착한 감독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처럼도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든든한 믿는 구석, 큰 어른, 초월자처럼 느껴지던 침착한 태도의 세르지오는 밥을 털어내고 경찰 단속에 잡혔을 때 천연덕스럽게 흉내내는 발레 동작을 끝으로 관객을 완전히 매혹시킨다.


윌라를 질 나쁜 인신매매범 무리에게 데려다주는 듯하더니 이내 마음을 바꿔 모두를 쏴 죽이고 저도 죽은 원주민 혈통의 아반티Q는 또 어떤가. 마지막 긍지를 지키겠다는 듯 아이만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고지하더니, 기어이 아이를 두고 떠나지 못하고 돌연 기관총을 쏴갈긴 그의 퇴장에는 극 초반부의 혁명 못지않은 숭고한 무게가 실린다. 침탈자 백인의 심부름꾼 노릇에 질릴 대로 질린 탓이었을까. 퍼피디아의 배신과 아반티Q의 배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전향’이다. 한쪽이 우리를 세상에 남은 일말의 선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유리시킨다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회복시키고 이어 붙인다.



그이들의 반대편에 침 흘리는 치매 노인들의 ‘순수혈통’ 타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백인 지도층 남성 소셜 클럽이 있다. 길 잃은 방랑자 즉 디아스포라를 돕는 성 니콜라스의 이름마저 훔쳐간 그들은 이민자로 굴리는 공장이 멈췄단 소식에 싼 인력으로 만든 맛있는 정크푸드를 잃었다며 슬퍼한다. 태생부터 모순과 배제로 이룬 극우 엘리트 집단이 파견한 새로운 암살자 팀은 밥이 훔친 폐차 직전 차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빠진 스포츠카를 타고 타겟을 좇는다. 그는 굽이진 길에서 윌라가 훔쳐 탄 차를 손쉽게 따라잡지만 마지막 고개에서 무엇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지 못해 죽는다.

그에게 당하고도 자길 암살하려 한 배후를 모른 체 다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을 섬기러 돌아온 록조의 ‘역강간’ 타령은 그래서 우습다. 그는 퍼피디아가 자신의 우월한 씨를 탐내 약물 강간으로 씨 도둑질을 한 거라며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미국의 환부 중에서도 가장 안쪽을 점령한 집단에게 제 약함을 호소하고 이해를 구하는 전략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일 것이다. 교만해서 실패한 범죄자가 될지언정, 겸허하고 포용적인 이해자가 되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 클럽이 표상한 미국의 마지막 남은 신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걸 얻었다고 착각해 긴장을 푼 그때, 나치의 유대인 말살을 연상케하는 독가스로 암살당한 록조는 수용소에서 시작해 수용소에서 끝을 본다. 퍼피디아와 같은 젊은 흑인 페미니스트에게 지배받고 싶어하는 욕망, 마초가 되고 싶어 과히 의식한 걸음걸이, 윌라가 조롱한 쫄티와 굽 높은 군화까지. 디나이얼 퀴어여서 더더욱 소수자 배타적인 이너 서클에 진입하길 열망한 건 아닌지 의심한 남자의 아메리칸 드림은 개츠비보다도 비천하고 못생긴 결말을 맞는다.


이 모든 열락이, 모든 인정투쟁이, 죽음과 포격과 파편과 재생이 뒤섞이는 와중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움직이는 밥에게 할애되는 영화의 시간은 그래서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딸아이의 안전과 단순한 행복 그뿐이다. 밥은 지나간 이름에 미련을 두지도 않고 앞으로 다가올 싸움에 새 희망을 걸지도 않는다. 결말부, 재회한 밥과 윌라가 박탄 크로스에 돌아오자 ‘혼혈’ 윌라는 자기 자리와 삶의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연대를 찾아헤맨다. 밥은 오클랜드로 시위 나가는 딸을 말리지 않고 17년 전 여자친구를 배웅하던 것처럼 여상히 인사한다. “혁명 잘하고 와.”

이것이 언제나 비껴서 있는 밥의 최선이다. 그는 정의로운 반동분자를 위해 집을 쓸고 식사를 챙기고 뉴스를 들으며 시위 현장의 위협을 우려하고 가끔 <알제리 전투>를 보며 지난 시절의 전쟁을 되새길 것이다. 이것이 시민 밥의 최선이다. 아무리 용써도 혁명 ‘주체’의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지는 못할 것이다. 혁명은 그래서 혁명이란 이름을 얻는다. 가장 급진적이고 용감하고 무모한 이들의 객기에 가까운 투신을 경유해서 비로소 대중에게 뉴스 한 줄로 도달하는 방식으로. 그러나 기이하게도 어떤 균형의 법칙이 작동하는지 매번 새로운 세대의 반골이 자연히 육성되고 사람들은 자기주장을 다 잊고 산 듯 보이다가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력을 불사하고 거리에 나선다. 그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반동과 생활 사이의 경계가 실은 불분명했음을 깨닫는다. 사악한 사회의 미약한 정의란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 정세랑, <피프티 피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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