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너' 이해하기
쌓인 피로덕에 오전운동을 쉬고 늦잠을 잔 날이었다. 점심도 먹고 나서 느지막이 출근을 하는 중이었는데 학교가 끝났는지 막 걸어오기 시작한 아이들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막 탈색을 마치고 온 친구를 만난 나는 20만원짜리 머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논술선생님을 시작하고 난 뒤로 종종 생각하는 일은 동네에서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편하게 돌아다니다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의 그 머쓱함이었다. 크지 않은 동네라서 걱정했던 것에 비해 아직은 한 번도 안 만나서 다행이라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보이는 익숙한 얼굴, 수요일에 만나는 4학년 J였다. 워낙 사람을 잘 알아보는 터라서 저 멀리서 실내화 가방을 흔들며 털레털레 걸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더 문제는 '어떻게 아는 척을 하지' 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눈은 친구에게 고정 한 채로 온몸으로 J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뭇머뭇하며 친구와의 대화를 끊고 인사를 해야 할까 계속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만약에 외향적인 성격의 아이였다면 아마 저 멀리서부터 친하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을 것이다. 만약 길거리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런 얼굴과 그런 모습을 할 아이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J는 아니었다. 갑자기 느려지는 발걸음이 J도 나를 알아보았음을 증명했다. 친구와의 대화를 갈무리하며 힐끔 쳐다본 J의 시선 또한 나에게 문득 멈춰있다 어색하게 아래로 향했다. 타이밍을 놓쳐 그냥 지나쳐 보내버리고, 친구도 보냈다. 땡볕 아래 걷던 J는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더더욱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도 J처럼 그다지 외향적이지는 않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선생님이 되어서도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에게조차 먼저 살갑게 인사하는 순간을 곧잘 걱정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J의 뒷모습을 보다 나는 결국 잰걸음으로 J를 따라잡았다. 내둥 고민하던 나는 큰 소리로 J의 이름을, 아주 다정하게 부르며 말을 건넸다.
"학교 끝났어? 집에 가는 거야? 그래 안녕, 다음에 학원에서 보자"
가볍고 별 것 아닌 인사였다. J는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 나를 보며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네, 네, 네. 꾸벅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아주 익숙한 아이를 발견했다. 어린 나였다.
사람을 알아보는 건 잘하나, 사람에게 살가운 건 어려웠던 나는 어릴 때부터 인사를 적극적으로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먼저 인사를 건네면 그제야 몰랐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던 아이. 그게 나였다. 나는 늘 나중에 인사를 받아내고선 서둘러 걸어가기 바빴다. 멀리서 종종 아는 얼굴들이 보여도 '날 못 봤겠지'하고 사라지는 것도 곧잘 하던 숫기 없는 아이였다. 그렇게 지나쳤던 사람들은 분명 나를 모를 거라고 확신하던 순진한 시절도 있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 나를 못 알아보겠지 하던 뻣뻣하고 수줍었던 나.
오만이었다. 저 멀리서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도, 조금 돌아가도 내가 아는 사람은 한눈에 띄었다. 분명 내가 그렇게 스쳐갔던 사람들도 나를 모두 알아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감아주고 모른척했던 건 숙이는 고개보다 더 크게 뛰었던 내 심장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거다.
J가 들고 있던 실내화가방을 흔들며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엔 어쩐지 울적해졌다. 양산을 쓰고 햇볕아래 있는 내가 너무나... 너무나 커져버린 것 같아 싫었다. 괜히 돌아본 J의 뒷꽁무니엔 모든 게 어렵고 낯설었던 아주 어린 내가 길 어귀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불러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모든 게 어색하고 어려워도 괜찮다고. 넌 언젠가 먼저 인사할 줄 아는 씩씩하고 다정한 사람이 된다고. 그리고 고마웠다. 그런 나의 존재 때문에 나도 다른 수줍은 아이들을 아주 쉽게 이해하고, 먼저 인사할 용기도 가지게 해 주었다. 그 횡단보도에서 내가 다정하게 부른 이름은 J뿐이 아니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