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와 카페사장 1

1. 아파도 쉴 수가 없다

by 케이

어제 오후에 갑자기 허리가 아프고 두통이 왔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뼈마디가 쑤셔왔다.

확실한 전조증상이었다. 몸살이다.


2주 전인가 감기가 와서 카페를 일찍 닫고 병원에 다녀왔었다. 그때 수액도 맞고 약도 잘 챙겨 먹어

괜찮아졌는데 갑자기 몸살이라니...

증상은 점점 심해져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고 식은땀까지 흘렀다. 홀에 있던 손님이 다 나간 때가 8시 조금 넘은 시간, 서둘러 마감 청소를 하고 카페 문을 일찍 닫았다. 원래 가게 문 닫는 시간은 밤 10시, 웬만하면 그 시간을 지키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바로 동네 심야약국을 갔다. (우리 동네에 이 약국이 생긴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밤 11시까지 한다) 증상을 얘기하고 센 약으로 달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씻고 보니, 감자수프 베이스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감자수프는 우리 카페 인기 브런치메뉴라 준비를 안 할 수가 없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감자수프 베이스를 만들다 보니 서글퍼졌다.


이래저래 정리를 하고 2회 분량의 약을 먹은 다음 전기패드를 평소보다 높은 온도를 설정하고 드러누웠다.

"아이고 끙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일도 이러면 어쩌나 걱정하며 잠이 들었다. 패드가 너무 뜨거워 중간에 자다 깨다 했지만 한결 나은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7시 50분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제보단 나았지만 몸살 기운이 여전했다.

그래도 쉴 수는 없었다. 일요일이었고 카페 문을 열어야 했다. 카페를 열면서 마음먹은 건 큰 일없는 한

카페 문을 닫지 말자는 것이었다. 손님과의 약속이니까.


오픈 준비를 하면서 과거의 몇몇 기억이 떠오르면서 실소가 나왔다.



98년이니까 27년 전 일이다.

그때 나는 방송입문 2년 차, 시사탐사프로그램 막내작가였다. (지금은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지키고 있는

김상중 님이 첫 시사프로그램 진행을 했던 'SBS 추적, 사건과 사람들'이다)

당시 방송은 수요일 생방송이었고 -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 수요일 오전에 VCR 녹음을 했던 것 같다.

방송 전 일요일 밤인지, 월요일 밤인지 원고를 쓰던 메인 작가가 배가 아픈 걸 참고 일하다

급기야 쓰러졌다. 놀란 피디가 작가를 업고 병원으로 갔고, 맹장이 터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은 급히 진행됐지만 제작팀은 난리가 났다. 시간이 없었고 메인 작가는 대체할 수 없었다.

결국 편집된 영상을 디테일하게 타임체크(*)를 해서, 병원에 있는 작가에게 날랐고

작가는 병원 병상에서 원고를 썼다. 그리고 대체가 가능한 부분은 프로그램 안의 다른 메인 작가들이

조금씩 나눠서 원고를 썼다. (당시는 지금처럼 영상을 파일로 주고받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걸

준비해서 병원으로 직접 가져가야 했다)


결국 방송은 문제없이 잘 나갔다.

그때 배운 것이 '아, 피디나 작가는 방송 직전엔 아파도 아플 수가 없구나'였다.


그리고 그 일은 남일이 아니었다.


10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1시간 분량의 다큐 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피디와 파이널 컷(**)을 하는 데 몸이 으슬으슬했다. 감기 몸살인 것 같았다. 끝난 시간이 토요일 밤 10시가 넘었을 때라 문을 연 약국이 없었다. 그러나 원고를 써야 할 때라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밤에 문 여는 약국을 검색해 감기 몸살약을 사 집으로 왔다.

약을 먹고 잠시 잠을 자려고 했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살이라고 하기엔 온몸이 너무 아팠다.

더빙은 월요일 아침 10시, 그때까지 원고를 넘겨야 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일요일 내내 원고를 썼다. 누군가 계속 내 몸을 때리는 것 같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월요일 아침, 시간에 맞춰 원고를 넘기고, 수정할 부분이 있을지 몰라 1시간 정도 기다린 다음

병원에 갔다. 열을 재보니 39도를 넘고 있었다.

진단 결과 신종플루였다. 언제부터 아팠냐고 해서 토요일부터라고 했더니 의사 선생님이 열이 심해서 많이 아팠을 텐데 응급실이라고 가지 왜 이제 왔냐며, 어지간하다는 반응을 보인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방송은 시간이 정해져 있다.

방송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작가나 피디를 대체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픈 것도 방송이 끝나야 아플 수 있다.

주변엔 부모님 임종이나 아이의 탄생 등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무슨 대단한 사명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카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 가게인데 아프거나 일이 생기면 문 닫으면 되지, 하루쯤 안 연다고 무슨 일 생기겠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카페를 하기 전엔.

내가 왜 방송작가를 그만뒀는데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과 함께

이번 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카페 역시 손님들과의 약속이다.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닫는 약속.


물론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에는 가게를 닫는 날이 생기기도 한다. 혼자 하는 자영업자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그런 날을 줄이는 것이 신뢰를 지키는 것일 것이다.


방송작가든, 카페 사장이든,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위에 언급된 방송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 타임체크 : 영상에 나오는 그림과 인₩터뷰를 상세히 기재하고 그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초단위로

기록하는 것. 흔히 촬영된 영상을 기록하는 프리뷰라는 작업이나 내레이션 대본을 쓰기 위한

단계에 필수적으로 사용함


**파이널컷 : 작가의 편집구성안을 바탕으로 또는 피디가 구성하여 한 편집을 가편본이라 하며

가편본을 작가와 피디가 함께 의논하며 수정해 완편본을 만드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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