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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을 쏘다 Apr 14. 2023

치료한 환자로부터

얼마전 나는 관해에 도달한 백혈병 환자를 병원 복도에서 만났다. 치료하던 내내 그는 딸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웠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에 나오는 데이터가 너무나 무서웠다. 급성 전골수구성 백혈병은 예후가 양호한 질환이고, 운좋게도 약제 단독으로 관해율이 90%에 달한다. 하지만 나는 곧 깨닫게 되었는데, 어느날 백혈병 환자가 되어 수일 내로 죽을 운명이 된 이에게 이런 말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책에 쓰여 있는 말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한 사람과 백혈병 환자 사이의 간극은 넓고도 깊었다. 


나는 내 환자가 그 10%에 해당하면 어떨지 너무나 불안했다. 병원 안에서 이런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을까. 누가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처음인 법이다. 공부는 나중에 마음껏 해도 좋을테니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나에게 설명해 준 사람이 있었다면 좋을텐데.


그 사람이 살아난 이후로, 나는 생애 처음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제 왠만한 잘못을 해도 지옥에 들어가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누군가는 이걸 오만이라고 부르겠으나,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해해 주리라. 내가 경험하건대 의사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 훨씬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 넣고 기쁨을 주는 사람들, 존재 만으로도 희망을 주는 사람들 말이다. 


나에게 부단히도 새로운 경험을 주고, 내가 작은 사람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내 직업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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